소심한 인간의 하루
어젯밤 잠이 들기 전 매트리스에 누워 인쇄소 직원과 싸우는 상상을 했다. 아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화를 낼 수밖에 없죠, 기사님. 저도 돈 받고 팔아야 하는 책인데 그렇게 할 순 없어요. 주문한 거랑 다르잖아요. 그리고 면지 크기가 다른 게 네 권이나 있고. 상상 속의 목소리와 싸우는 중이었다. 화가 나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느껴졌다.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왜 미리 열을 내고 있지? 나 누구랑 싸우는 거지? 생각해보니까 벌써 이렇게 싸울 필요는 없는 거잖아? 숨을 골랐다.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고. 내가 지금 이렇게 싸움을 연습한다고 해서 달라질 일은 없으니 잊어버리자, 잠을 자는 거야. 잠을. 숨을 다시 한번 깊게 들이마신 다음에…… 그렇게 열 시간을 잤다.
오래 잔 탓인지 멍하고 띵한 머리를 깨우려 환기를 했다. 역시 오늘도 추운 날이네. 점심을 먹고 팟캐스트를 들었다. 밥 먹으면서 티브이를 보기는 싫고 밥만 먹기는 심심해서였다. 60분이 안 되는 에피소드 두 개를 듣고 나니 바람을 좀 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옷을 주섬주섬 껴입었다. 근처 공원으로 가서 걸었다. 유월절이 어쩌고저쩌고 설문 조사를 부탁한다는 사람들이 네 번씩이나 나에게 말을 붙여 짜증이 났다. 산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상했다. 집으로 돌아와 책을 읽었다. <5년 만에 신혼여행>을. 책을 읽던 도중 전화가 걸려왔다. B로부터. 약속이 있어 집을 나온 김에 우리 집 근처로 왔다는 것이었다. 난 다시 옷을 주섬주섬 입고 밖으로 나갔다.
B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고 싶다고 한 키보드를 전해주었다. 누르면 타닥타닥 소리가 나는 옛날 키보드였다. 청축과 갈축 중에 고민하다가 갈축으로 정했는데, 지금 그 키보드로 글을 쓰는 중이다. 찰칵거리는 청축보다는 소음이 덜하지만, 탁탁탁 소리가 나는 게 듣기가 좋다. B와는 카페에 들어가 차를 마셨다. 나는 단 게 당겨 민트 초코 라테를, B는 아이스 딸기 라테를 마셨다. 나는 속이 쓰렸다. 책 때문인가 봐. B는 그런 것 같다고 맞장구쳤다. 아, 나는 진짜 소심한 사람이다. 역시 털털 과는 거리가 먼 걸까. 책이 잘못 나와 속까지 쓰리다니. 소심도 이런 소심이 없다. 따뜻한 민트 초코가 들어가니 속은 금세 괜찮아졌다. 역시 당이 최고다.
서로의 고민을 나눴다. 연말을 맞이해 고민이란 고민은 우리 둘이 다 짊어진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다시 책을 읽으며 포카리 스웨트 음료수와 아몬드 빼빼로를 먹었다. 속은 완전히 괜찮아졌다. 당이 당겨서 그랬던 걸까. 역시 스트레스와 근심 걱정엔 단 것만큼 좋은 게 없다는 생각을 한 뒤 씻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중이다. 오늘 적고 싶은 글이 있었으나 내일을 위해서 아껴둔다. 더 정리해서 잘 써야겠다는 생각이다. 내일은 2018년의 마지막 날이다. 내일 하루를 뚱한 기분으로 보내고 싶지 않으니 책 일이 잘 마무리됐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제발 제발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