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기록하자/제주도 한달살기

제주 한 달 살기 03. 태풍 잘 이겨내세요

담차 2018. 8. 22. 23:46

[03]
공항 근처 숙소-구좌읍 종달리(종달 초등학교-소심한 책방-엄마 식당 )

제주도 전역 태풍경보. 해안 근처 접근 금지와 선박대피 등 피해가 없도록 주의하라는 경보가 울렸다. 오후 1시쯤 도착한 구좌읍 종달리에는 다행히 비가 많이 내리지 않았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방울에 바람이 부는 정도였다. ㅡ11시 30분이 막 넘어간 지금은 가만히 서 있기 어려울 정도로 바람이 분다ㅡ숙소에 짐을 맡기고 체크인하기 전까지 동네를 구경하기로 했다. 종달리는 어딜 가나 돌담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우도와는 또 다른 느낌의 따뜻함이 있는 곳이다. 대문이 없는 집에 대부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무언가를 하고 계셨다. 조용하고 평온했다.


종달 초등학교는 아담하고 예뻤다. 학교 안에 트램펄린이 있어서 몰래 들어가 방방 뛰었다. 어렸을 적에 놀던 게 생각나서 신이 났다. 마구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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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곳곳에 큰 나무가 세 그루 있었다. 난 나무를 보는 걸 좋아하는데, 이렇게 마을 한가운데 있는 나무를 보는 건 왠지 더 좋다. 그곳을 지켜줄 거라는 믿음이 생겨서 그런가.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대신 해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놓여서 그런가.
엄마식당에서 딱새우 카레를 먹었다. 쉰다리라는 쉰 밥을 이용해 만든 술도 마셨다. 원체 술이 약한 내가 먹고도 안 취하는 술이라니, 딱이다. 톡 쏘는 요구르트같은 맛이다. 카레도 술도 맛있었다. 가격이 좀 비쌌지만.


마을을 구경하다 우연히 들어간 카페 겸 편집숍의 사장님이 점점 바람도 불고 비도 오지요, 하고 물었다. 대화를 잠시 주고받다 돌아가는 뒷모습에 “태풍 잘 이겨내세요.” 덧붙였다. 태풍 잘 이겨내세요. 그 인사가 어쩐지 낯설었다. 서울에선 들을 수 없었던 말이니까. 이곳에선 태풍이 흔한 일일 테지. 안녕을 바라 준말 한마디가 고마웠다.
내면의 태풍 에겐 어떻게 안녕을 바랄까 생각해봤다. 내가 이곳에 오게 된 것도 모두 내면에서 휘몰아치는 바람 때문인데, 난 그것이 잠잠해지기 위해 어떻게 했나. 요즘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 나의 유일한 안녕이다. 마음 속 몰아치던 비바람이 잠시나마 멎고 내면의 창의 덜컹거림이 잦아지는 일인 거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책을 읽었다.



소심한 책방에서 만난 그림책 <책섬>을. 작가는 글을 쓰는 것을 황무지 섬에 가서 삽으로 구덩이를 파내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글이 문장이 되고 그 문장이 모여 단락이 되고 한 권의 책이 되는 과정을 독특하게 그린 책이다. 너무 좋아서 그 자리에서 두 번을 읽었다. 책에 인용된 문구에 잠시 눈이 머물렀다.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고백, 쓸모 있는 고백이 있을까?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은 모두에게 일어났거나, 각자에게만 일어난 일. 모두에게 일어났다면 그건 새로운 게 아닐 테고, 각자에게만 일어났다면 어차피 이해되지 않을 터. 만약 내가 느낀 것을 쓰는 것이라면, 그것은 느낌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쓰는 것.
-<불안의 책>중에서

우리는 각자 내면의 소용돌이 치는 바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난 내면의 바람을 멎게 하려고 글을 쓴다. 사실 우리 모두 그렇지 않을까. 모두가 비슷하게 폭풍을 맞이하고 바람을 견디고 비를 맞는다. 그 시기가 다를 뿐. 쓰면 쓸수록 더 좋은 글, 더 솔직한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생기지만 결국은 나를 위해 쓴다. 태풍 잘 이겨내세요, 하고 말한 누군가의 친절처럼 난 나의 마음속 안녕을 바란다. 평안을 위해. 태풍 잘 이겨내자, 다독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