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쏘고 가라!
글은 누구나 쓸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요시다케 신스케의 <있으려나 서점>에선 책의 감수성이 미래의 작가를 ‘선택’하는 그림이 나온다. 어떻게 선택하느냐, 바로 침 쏘기다. 엄마 손을 잡고 길을 걷는, 아직 어린아이인 미래의 작가 주변에 누군가 숨어있다. 그리곤 그 아이 목에 침을 쏜다. 그림 위에 적혀있다. ‘작가의 감수성은 전문 기술자가 선발한 미래의 작가에게로 몰래 전수됩니다.’ 난, 이 그림이 계속 생각났다. 작가는 스스로 선택하는 게 아니라 선택받는 존재구나.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 누구도 아닌 책이 그렇게 만드는구나.
내가 생각하는 작가란 개인적이다. 음침한 곳에서 자연을 벗 삼아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해서 글을 쓰는 사람이다. 특별히 만날 누군가도 필요 없고 그럴 필요를 못 느끼는 사람. 길거리를 지나도 알아보는 이 없어서 편하지만, 글만큼은 많은 사람의 생각 속에 존재하는 사람. 일 년에 서너 번씩 이사를 해도 이상할 것 없는 사람, 갑자기 해외에 나가 몇 달을 살아도 그러려니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예민하고 사적인 영역을 중시하는 사람이 작가라 생각했고, 이 점이 맘에 들어 글을 쓰고 싶었다.
독침을 맞는 ‘선택’을 갈망하던 나에게 다른 시선을 갖게 한 책은 <박완서의 말>이었다. 1990년부터 19988년까지 작가와 나눈 인터뷰를 엮은 책이다. 오랜 시간 읽다가 어느 순간 쓰게 됐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작품과 그 안에 그려진 시대 문제 등에 대한 대담이 이어졌다. 말이 글이 되는 순간을 상상했다. 작가의 집에서 차를 마시며 나누는 이야기, 그 공간을.
말이 글이 되지 않는 책은 없을 거다. 소설, 산문, 잡지 모두 말이 중심이었다. 어디서 들은 말,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영화 속 주인공 대사까지. 하지만 실제 존재하는 인물, 그중에서도 말을 만들어 내는 사람의 것이 다시 글이 되는 걸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말이라 더욱. 읽으면 읽을수록 작가의 사적인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 불안했다. 책 안에 담긴 모든 말들이 살아 숨 쉬는 것 같아 두려웠다.
90년대에 나눈 생각들이 2018년도에 사람들에게 읽힌다. 그 이상한 시간 간격을 느끼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누군가의 일기를 훔쳐보는 기분이었다. 내 짐작도 빗나갔다. 선생님이라면 이런 대답을 하지 않을까 하고 상상하며 읽었던 질문 밑엔 전혀 다른 것이 적혀있었다. 적잖이 당황했다. 3분의 2를 읽고 서점을 나섰다. 눈이 뻐근해 도저히 못 읽겠어 나온 것이었지만 책을 펼칠 때와 덮을 때의 느낌은 사뭇 달랐다.
천천히 한 시간을 걸으며 생각했다.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다. 생각은 말할 것도 없다. 생각이 신념이 되기 전까지는 수없이 바뀐다. 어쩌면 선생님도 그럴 거다. 내가 직접 선생님께 ‘인터뷰에 나온 질문에 대해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시냐’ 물어본 것도 아니고 그럴 수도 없으니 더 할 말이 없지만. 결론은 그 생각이 어떻게 됐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는 거다.
하지만 책엔 적혀있다. 까만 글자로 알알이 박혀있다. 그 시절, 작가의 생각이. 난 생각했다. 내 생각이 어딘가, 그것도 책 속에 갇혀있는 건 두려운 일이구나. 지극히 개인적인 직업도 두려운 면이 있구나. 사람이 하는 일 중에 두렵지 않은 걸 찾는 게 더 빠르겠지만, 작가의 글을 보고 두려움을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내 생각도 어딘가에 묶여있고 그대로 보존되어 독자들이 날 판단한다면 난 좀 무서울 것 같다. 나처럼 누군가가 내 글을 보고 ‘어? 이 사람? 생각했던 거랑 다르네?’ 하면 어떡하지.
하기 전에 겁먹을 필요는 없다. 우선, 하고 나서 생각하자. 너무 깊게 생각할 필요 없다. 저런 인터뷰도 박완서 선생님이니까 하는 거다. 난 우선 쓰기나 하자. 그나저나 나도 침을 맞았을까? 잘 모르겠다. 아니란 건 언제 깨닫는 걸까? 도대체 언제 알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하루에 한 번 지금 난 잘하고 있나 의심하고, 잘할 수 있다 다짐한다. 매일, 반복이다. 책이 작가를 선택하는 거라는 데. 그럼 책을 더 많이 읽고 느끼고, 쓰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