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 주의보

2018. 10. 31. 22:21에세이 하루한편



  며칠 전 주문한 겨울용 극세사 패드와 이불이 도착했다. 비슷한 시간에 왔으면 한 번에 빨았을 텐데 따로 오는 바람에 두 번이나 찬물에 손발을 담가 주물럭거렸다. 패드는 한쪽 면만 극세사고 밑에는 미끄럼 방지가 돼 있는 형태였다. 지퍼가 있어 매트리스 전체를 넣고 접었다 폈다 할 수 있어 좋았다. 맘에 들었다. 근데 이불은 좀 얇았다. 이걸로 한겨울을 잘 날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부들부들한 촉감이 좋은데 만져보면 내용물이 많지 않았다. 얇기도 얇아서 물에 젖은 이불을 들어 올리려다 북,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눈에 띄지 않지만, 올해 덮으면 다행일 정도로 약해 보였다. 진한 초록색이 맘에 들어 구매 버튼을 눌렀는데. 말짱 도루묵이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빨리 말려서 덮고 자보는 수밖에.

  패드를 빨고 베란다 건조대에 널었다. 물이 뚝뚝 떨어졌다. 물 때문에 배란다 바닥 마감이 들뜬 게 생각났다. 그래서 엄마가 웬만하면 여기다 널지 말라고 했는데. 햇볕이 따뜻한 오후 두 시 반이 넘지 않은 시간이었다. 햇빛에 말리면 금방 마르겠지 싶어서 얼른 세제를 헹구고 널어놓은 거였다. 패드의 모서리 쪽으로 물방울이 모여 바닥으로 톡톡톡 떨어졌다. 그럴 때마다 물이 다시 바닥에서 위로 튕겼다. 그때 생각이 났다. 문만 열면 바로 바깥이던, 마당이 나오는 그 집이 떠올랐다. 제주도에선 마당에 널면 됐는데.


  최근에 산 '나그참파' 스틱 향을 매일 피운다. 환기를 자주 시키고 물건 정리를 하고, 사용한 물건을 제자리에 둔다. 매일매일 머리카락을 쓸고 작은 변화를 주고 있다. 예를 들면 그림을 벽에 붙인다거나 피아노 위에 올려진 인형을 치우고 화분을 올려놓는다거나 하는 것 말이다. 흰색 접이식 매트리스 위에 짙은 회색 패드를 깔고 초록색 이불을 덮으면 또 방 분위기가 달라지겠지. 나는 내 방에 애정을 들이려고 하는 중이다. 내 방과 친하게 지내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여행은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란 말이 떠올라서. 돌아오면 가장 먼저 내가 찾는 곳이 바로 이곳, 내 방이니까. 어딜 가던지 다시 돌아오던 곳이니까. 또 떠나고 싶어질 때마다 내가 지내던 이곳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래서 더 가꾸게 된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렇다. 떠나고 싶으니까, 방을 정돈한다.

  바람에 날리던 양말과 옷가지들이 떠오른다. 무더운 팔 월, 쨍쨍한 하늘이 금세 빨래를 마르게 했던 날들을. 뽀송뽀송하게 마른 옷가지들에선 정돈된 냄새가 났다. 습하지 않고 축축하지 않은, 완전히 다 마르면 나는 냄새. 막 마른 것을 입으면 느껴지던 따스한 온도까지 떠오른다. 이곳에선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쉽다. 옷에 빨래집게 자국 안 나는 건 좋지만, 녹슨 집게의 녹 자국이 묻는 일도 없어 좋지만. 날 좋은 날엔 마당 귀퉁이에 옷이며 이불이며 널던 그때가 그립다. 같은 방향으로 넘실거리는 옷을 가만히 보는 것도 좋고 햇빛 냄새 잔뜩 묻은 이불을 바로 덮고 자던 그 밤도 좋다. 오늘따라 더 그립다. 이건 다, 빨래 때문이다. 빨래 탓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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