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 달 살기 10. 불행하지 않음과 행복 그 어디쯤

2018. 8. 29. 23:57여행을 기록하자/제주도 한달살기

[10]
바라나시 책골목

아침에 일어나 고구마를 먹고 책을 읽다가 누워서 쉬고, 점심을 준비하고 점심을 먹고 빨래를 개고 외출 준비를 했다. 바라나시 책 골목이라는 책방이 오늘의 목적지다. 책방은 제주시 동한두길에 위치한 바라나시 책 골목이다. 책방이 늘어선 책 골목인 줄 알았는데, 책방 한 곳이었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건 노란색으로 칠한 벽과 큰 평화 무늬, 샨티라고 적힌 푯말이다. 인도 짜이를 파는 이곳은 한눈에 봐도 사장님이 인도 문화를 좋아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책방 내부에 들어서면 더 확실해진다. 인도 음악이 흐르고 코끼리 신 가네샤가 그려진 커다란 천이 벽에 걸려있다. 이국적이지만 불편하진 않다. 오히려 안락하고 조용한 공간이라 책 보기에 좋았다.


난 짜이 밀크티 아이스와 블루베리 토스트를 먹었다. 카페인에 유난히 약해서 밀크티만 마셔도 어지럽고 힘이 들지만, 사장님이 직접 끓여주시는 인도 전통 밀크티라 안 먹으면 후회할 것 같았다. 결과는, 카페인 때문에 많이 힘들지도 않고 괜찮았다. 맛있었다.



오늘 읽은 책은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라는 김보통 작가의 수필집이다. 덥고 눈이 뻐근했지만 앉은 자리에서 책 한 권을 다 읽었다. 4년간의 회사 생활-그것도 대기업-을 청산한 작가의 이야긴데, 뒷이야기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한 장씩 넘겨 읽으면서 퇴사 후 행복한 미래가 펼쳐지는 이야기이기를 바랐다. 나 또한 같은 처지이기 때문에. 책의 결말은 어떻게 됐냐고? 그가 행복하다고 할 수도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굳이 그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다행히 아직 불행하지 않다, 이다.


그는 행복한 삶을 원하지 않는다. 불행하지 않은 삶을 원한다. 퇴사 후 어느 순간부터 식비를 아끼기 위해 매일 식빵을 먹다 곰팡이 핀 것을 발견한 후로, 자신에게 디저트를 선물해 주고자 브라우니를 만들어 먹는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떠난 오키나와 여행에서 빈손으로 돌아와 도서관을 만들려고 하지만 포기를 결심하던 시점이다. 도서관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이천여 권의 책을 사느라 퇴직금의 반을 써버린 그는 제빵에 관한 책이 있는 것을 보곤 하루에 하나씩 자신을 위해 만든 것이다. 실패로 탄생한 빵 브라우니를.
그는 브라우니를 만들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 그림에 소질이 있어 중학교 담임선생님에게 관심 어린 애정과 지원을 받았지만 예고 진학? 개소리 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 한마디로 무산됐다. 하지만 브라우니를 만들어 먹으며 매일 트위터 친구들의 프로필 사진을 무료로 그렸다. 그림을 그려달라는 이들이 늘어났고 재미난 일화까지 짤막하게 올릴 때 즈음, 웹툰을 그려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고, 아만자라는 만화를 그렸다. 현재 만화가가 되었고 글을 쓰며 책을 낸 작가가 되었다.

나도 인생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체감했다. 사실 오래되지 않았다. 앞으로 겪어야 할 큰 파도 중 자잘한 물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대로 살 수는 없어서, 내 불편한 마음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가는 게 좀 이상했다. 회사 생활에 대한 고충을 늘어놓으면 원래 그런 거야, 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해가 안 갔다. 원래 그런 거라면, 참고 살아야 한다면 왜 사는 거지? 궁금했다. 그럼 어떻게 살 것인가. 그가 스스로 계속 물었던 것처럼 나도 나에게 묻는다. 퇴사 29일 차인 나는 아직 모르겠다. 적어도 몇 달은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그것이 실현 가능한 것인지는 또 다른 문제다. 아직 나는 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도 힌트는 얻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는 걸 봤으니.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 당장 싫은 사람을 만나지 않고, 원치 않는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매일매일 불행에서 도망치는 것이 내겐 더 중요한 일이다.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이 옳은지 어떤지는 모른다. 사람에겐 저마다 살아가는 방식이 있는 것이고, 나는 이런 방식으로 살아갈 뿐이다.



이 책을 통해 내가 하려던 이야기는 이것이었다. 세상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내 인생과 상관없다. 안타깝게도 내 뜻대로 되는 일도 별로 없다.
(중략)
다행히 아직도 불행하진 않다.

불행하지 않은 삶은 행복하다고 할 수 없지만, 행복의 언저리에 있다고는 할 수 있을 거다. 어느 것 하나 딱 맞아떨어지는 게 인생이 아니듯, 불행하지 않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그의 말이 위로가 됐다. 불행하지 않게만 살아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구나, 하는 용기를 얻었다. 난 지금 어떤가를 되돌아봤다. 서울로 돌아가 구체적인 계획을 짜진 않았지만, 이 순간 행복하다. 행복으로 충만하다. 불행하지만 않아도 감사할 판에 행복하기까지 하다. 나도, 그거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