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다 하다 기쁨 찾는 것까지 게으르면

2018. 11. 4. 22:32에세이 하루한편



  엄마 아빠의 결혼기념일이다. 때마침 휴무인 아빠와 온 식구가 모였다.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 오빠 이렇게 여섯 명이. 할머니를 태운 휠체어를 끌고 식당으로 갔다. 엄마 아빠가 결혼기념일을 알아채는 건 항상 11월이 다 돼서다. 아빠가 밥 먹다가 식탁 근처 벽에 달린 달력을 보고선 가만, 우리 기념일이 언제더라? 하고 물으면 엄마가 4일이지, 4. 하는 대답이 들려오고, 그럼 내일모레잖아? 그때 근무가 어떻게 되더라, 약속은 있었나?이런 식이다. 항상 그랬다. 어딜 가거나 특별한 이벤트를 만들거나 한 적은 없었다. 평소처럼 보내는 게 다였다. 나도 점점 무던해졌다. 예전에는 포스트잇 종이에 내 마음을 담은 쪽지 열 몇 장을 써 현관문에서 안방까지 붙였다. 그 편지를 읽으며 방으로 들어가면 선물이 짠. 이젠 편지를, 쪽지를 쓰는 일도 줄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어제 조각 케이크와 꽃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마저 잊어버렸으니.

  외식한 뒤 카페에 가서 레드벨벳, 티라미수 케이크 하나씩 샀다. 축하 노래도 부르지 않고 전기 포트에 물을 끓여 차를 내렸다. 따뜻한 페퍼민트 한 잔을 건네고 이것 좀 먹어, 얘기하는 게 다였다. 케이크를 개봉했다. 배가 부른 엄마 아빠는 많이 먹지 않았다. 포크 자국이 난 케이크는 냉장고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 청소를 하고 각자 쉬다가 두 분은 산책을 하러 갔다. 난 방에서 이 글을 쓰고 있고. 기념일이라는 게 뭐 이러냐. 꽃 한 송이 사 왔거나 초를 꽂아 축하 노래를 불렀으면 분위기가 달라졌을까. 생각해보면 우리 집안 식구들 기념일은 항상 그랬다. 생일도 마찬가지고. 그냥 주인공과 밥 한 끼 먹으면 땡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밥 한 끼 먹기조차 어렵다는 걸 알게 됐지만.

  오늘도 그렇다. 별다를 거 없이 식구들끼리 집 근처 식당에 가 밥 한 끼 나눠 먹는 게 다다. 조금 더 재밌고 특별한 걸 하면 좋을 텐데. 엄마 아빠는 산책이 다였다. 나도 나이가 들어 결혼한 지 이십 년이 넘으면 그러려나. 난 그때도 남편한테 꽃 한 송이는 바랄 것 같은데. 엄마는 아빠가 생전 꽃 한 송이 준 적 없다고 했다. 아빠는 멋쩍은 듯 웃었다. 그건 아빠의 표현 방식이 아니었다. 돼지갈비, 노가리, 생맥주, 아빠가 먹어보고 맛있는 음식을 사주는 것이 방식이었다. 새로 생긴 음식점을 데려가거나 안 가본 곳을 함께 가는 것이었다. 대부분 맛집은 낡고 허름한 곳이라 가끔 엄마가 툴툴거렸지만. 오늘도 시원한 맥주 한 잔 들이켜는 게 오늘이 가기 전 할 수 있는 제일 기분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허전한 마음은 숨길 수가 없었다.

 

  너무 평범하게, 무탈하게 지나가는 기념일이라 내가 다 허무할 정도다. 가끔은 와! 소리 지를 정도로 기쁜 일이 생기면 좋으니까. 내가 그 감정을 잊고 사는 것 같아 걱정이다. 작은 것에 기뻐하고 감사할 줄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잊어버리고 잃어버리는 건 아닌지. 그런 일을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도. 기념일이 뭐 별거나, 생일이 대수냐, 인생은 또 별거 있냐 말하면서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이 된 건 아닌지. 매일 같은 하루 속에서 작은 기쁨 찾는 걸 게을리하진 않았는지 돌이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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