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찮은 기억 덩어리 하드디스크

2018. 11. 12. 23:57에세이 하루한편


  7년 전 구매했던 컴퓨터 본체를 처분하기로 했다. 거실에 와이파이랑 공유기가 연결 돼 있는 본체였는데 고물이 됐다. 엄마가 공유기 위에 붙어있는 KT 설치 기사에게 전화했다. 컴퓨터가 너무 흉물스러워서 버리고 싶은데요. 본체와 연결된 LAN 선을 뽑아도 와이파이를 사용하는 데 지장 없는지를 물어봤다. 그렇다고 했다. 진짜로 처치할 때가 왔군. 뽀얗게 먼지가 내려앉은 네모난 본체를 봤다. 운영체제가 Window XP니 인터넷이 느려도 너무 느려 본체를 발로 쾅쾅 치면서 문서 작성을 했던 기억이 났다. 본체를 버리는 건 처음이어서 인터넷 검색을 했다. 하드디스크에 메모리가 저장돼있으니 그걸 파기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개인정보 유출을 막을 수 있다면서. 나사를 풀어 본체를 열고 하드디스크를 꺼냈다. 바닥엔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살짝만 움직여도 폴폴 날렸다. 은색으로 빛나는 하드디스크. 이게 하드디스크란 말이지. 거실 바닥에 방석을 놓고 그 위에 신문지를 깔았다. 그리고 망치로 쾅쾅 내리쳤다. 어찌나 단단한지 계속 내리쳐도 긁힌 자국만 날 뿐 부서지진 않았다. 앞면은 은색이었고 뒷면은 검은색이었는데, 뒷면에 하얗게 쓸린 흉이 졌다. , 엄청 튼튼하게 만드네.

  나사가 작은 별 모양으로 박혀있어 풀기가 쉽지 않았다. 맞는 것을 찾으려 일자 드라이버, 십자형 드라이버, 그것보다 작은 드라이버, 손톱깎이를 동원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은색 뚜껑이 씌워진 틈 사이로 십자형 드라이버를 넣고 그 위를 망치로 탕탕 내리쳤다. 그러자 틈이 벌어지면서 점점 공간이 생겼다. 좋았어, 틈 안에 망치 뒷부분인 장도리를 넣어 있는 힘껏 밀었다. 아까보다 더 벌어졌다. 그렇게 반복하기를 몇 번, 십자형드라이버 손잡이가 빠져 은색 몸체만 길게 꼽히고 말았다. 반만 열린 하드디스크 뚜껑 사이로 덧니처럼 드러났다. 바깥보다 그 안에 있는 걸 망가뜨려야 복원이 안 될 텐데. 힘이 다 빠져버렸다. 뽑지 못하고 그대로 뒀다. 이렇게 뭔가를 망가뜨리는 것도 힘들구나. 내 온 힘을 쏟아 물건이 망가지길 바라는 게 진짜 오랜만이었다. 아니 처음인가.

 

  예전에 안티 스트레스라며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공간이 있다는 광고를 본 적이 있다. 손님은 우주인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어진 흰옷을 입고 흰 벽이 있는 방으로 들어간다. 물감이 담긴 통이 있다. 그 물감 통을 들어 벽에 냅다 들이붓는 거다. 그러면 하얀 벽이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으로 물든다. 물감이 흰옷에 튀기고 벽에도 튀긴다. 물건을 던져도 좋고 소리를 질러도 된다고 했다. 물건을 부수고 발로 밟고 바닥에 뒹굴고. 그런 데가 있었지. 사람이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으면 그런 곳을 따로 만들까. 그걸 본 게 언제더라. 나도 그때는 거기에 꼭 가야겠다며 흥분해서 말했었는데. 그럼 소리 지르면서 물건을 다 던져버릴 거라고 했는데.

  오늘 나도 안티 스트레스 체험을 한 셈이다. 눈에 튈까 봐 까만 선글라스를 쓰고 마스크를 끼고 두꺼운 장갑을 낀 채 쾅쾅 내리쳤다. 장갑을 벗으니 손에서 쇠 냄새가 났다. 마찰음에 내 귀가 아팠다. 생각보다 마음이 시원하다거나 확 풀린다거나 하는 건 없었다. 내가 지금 스트레스가 없는 걸까. 그건 아닌데. 이 기분은 뭐지. 7년 전 내가 쓰던 뭔가가 담겨 있는 게, 이런 딱딱하고 단단한 알루미늄으로 돼 있다는 걸 내 두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인가. 딱히 중요한 것도 없어 파일을 따로 옮기는 작업을 하지 않았는데. 부스러기가 널브러진 신문지 위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동안 애지중지하던 내 영화가 다 여기 들어가 있는 거였네. 내 졸업논문 수정 문서도, 밴드 못의 음악 파일도, 마리이야기 영화 파일도 다. 컴퓨터의 기억은 나의 기억이었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 건 내가 내 기억을 직접 없애려는 걸 온몸으로 느꼈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도 기억인데 말이야. 하찮은 쇳덩어리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