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진짜 장화를 살 때

2018. 11. 8. 22:41에세이 하루한편



  오전 8시에 할아버지에게서 온 전화가 울렸다. 새벽 1시쯤 누운 나는 잠귀가 밝아 금세 깼다. 다시 자보려고 눈을 감고 이불로 몸을 감쌌다. 찬 공기가 방안을 맴돌았다. 외출 준비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윗집일 거다. 엄마!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도 들렸다. 이건 아마 아랫집일 거다. 8시인데 학교 안 가나.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고 한 프레이즈를 반복해서 연주했다. 피아노는 10시부터 치는 게 매너 아닌가. 아랫집은 우리가 강아지를 키울 때 짖는 소리가 시끄러우니 주의해달라는 쪽지를 현관문에 붙이고 간 적이 있다. 나도 피아노 소리가 시끄러우니 주의해달라고 쪽지를 붙이는 상상을 하며 눈을 더 꼭 감았다. 안 들으려고 하니 더 잘 들렸다. 속으로 음을 따라 부르며 다음 프레이즈를 기다렸다. 천천히 치다가 원래 속도로 빨리 연주하려고 하면 틀려서 다시 천천히 건반을 꾹꾹 누르는 식이었다. 네 번 정도 반복했을까, 다음으로 넘어갔다. , 넘어갔다! 짜증도 제쳐두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지, 천천히 연습해야지 빨리 칠 수 있다고. 피아노 뚜껑을 닫는 쾅, 소리가 났다.

  도저히 오지 않는 잠을 기다리다 지쳐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암막 커튼을 걷어 아침을 확인했다. 커튼을 온종일 치고 살면 밤인지 낮인지도 모르겠다. 비가 내린다. 미세먼지를 씻겨줄 비가. 어제 새벽부터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리는 중이다. 외출하는 길, 은행 나뭇잎이 떨어져 바닥이 온통 노랑이었다. 낙엽이 빗물에 젖어 두둥실 떠 있다. 세찬 가을비다. 아니 어제가 입동이었으니 겨울비라고 해야겠구나. 겨울비에 모든 게 젖는다. 내 신발도 다 젖었다. 비 오는 날은 좋아하지만, 발 젖는 건 싫어하는 나는 한 번도 장화를 살 생각을 안 해봤다. 사야지 하다가 까먹고 비가 오면 또다시 신발이 새서 발이 축축해졌다. 그 기분이 싫어 사야겠다고 마음먹어도 까먹고, 또 까먹고. 기억나도 필요 없을 거라며 미뤘다. 너무 오래 끌었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난 뭐든지 빨리빨리 결정되기를 바랐다. 음악을 만들고 포트폴리오를 뿌리고 다닐 때도 그랬다. 빨리 누군가에게 연락이 와서 함께 작업하기로 하고 얼른 돈을 벌고 싶었다. 내가 안정적으로 산다는 걸 부모님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 무엇을 위해서? 라고 물으면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애가 탔다. 발을 동동 구르는 와중에 옆길로 잠시 샜다. 그래서 요즘은 글을 쓴다. 나에게 음악은 좋아하는 것보다 잘해야 하는 것이 돼버려서. 조금 더 나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 지름길인지 골목길인지 막다른 길인지 모를 샛길로 걸음을 옮긴 지금도 난 급하다. 글을 써서 빨리 어딘가에 연재하고 싶고 용돈이라도 벌고 싶다. 또 이유를 묻는다면 앞서 적은 것과 같다.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그토록 싫어하고 후회했으면서.

  세상이 만들어놓은 잣대에 언제나 주춤하게 된다. 이 나이가 되면 취업은 해야 하고, 결혼해야 하고 등의 쓸데없는 말 때문에. 나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말자고 생각하지만 휩쓸릴 때가 있다. 20대 후반이 되어서도 방황할 줄 몰랐던 나는 당황했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불안했다. 내 인생이 망할까 봐. 웃기지만 사실이다. 하지만 매 순간 다짐한다. 이 순간 행복 하자고. 지금이 제일 중요하다고. 심호흡 크게 하고 다시 가자고. 천천히 한 음씩 꾹꾹 누르며 연습해야 빠르게 연주할 수 있으니까. 나도 지금 기본을 다지는 중이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너무 먼 미래를 생각하기보단 지금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을 찾는다.


  내 행복을 위해서 주춤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너무 멀리 밀어 두진 않았는지. 일부러 잊으려 노력하진 않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