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에 담긴 그리움

2019. 3. 19. 00:02에세이 하루한편

 

퇴근하고 집에 오니 커다란 비닐봉지 하나가 거실에 떡하니 놓여있었다. 안에는 옷가지들이 가득했다. 엄마와 고모가 할머니 옷을 정리한다더니 입을 만한 옷을 간추려 가져왔나 보네. 배가 너무 고파 저녁을 먹고 피곤이 몰려와 잠깐 누워있을 때만 해도 옷에 대한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졸음을 떨치고 씻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제야 비닐봉지 안에 있는 옷을 들춰봤다. 할머니는 옷이 많았다. 예전에도 우리 집 근처로 이사 오셨을 때, 병이 들고 나서 입을 옷을 간추릴 때, 옷 정리를 했지만, 아직도 옷이 한가득했다. 누군가 선물해 준 옷, 할머니가 아까워서 버리지 못한 옷, 고모가 사준 옷, 안 입는 옷들을 할머니는 모두 모아두셨다. 내가 들어갈 만큼 커다란 비닐봉지에 켜켜이 쌓인 옷들도 다 그런 것들이겠지. 누군가 입겠지, 라고 생각하다가 세월이 흘러버려 지금까지 와버린 것. 겨울옷과 여름옷, 긴 치마와 입지 못할 만큼 낡은 것들이 마구 섞여 있었다.

집에 계실 때 자주 입혀드리던 분홍색 털조끼가 눈에 띄었다. 할머니가 조끼를 입은 모습이 떠올랐다. 나도 한 번 입어봤다. 누가 직접 뜬 건지 아니면 산 건지 모를 조끼는 포근했다. 할머니 냄새가 배어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으니 오른손에 뭔가가 잡혔다. 꺼내 보니 지폐였다. 만 원짜리 지폐 네 장. 세 장은 잘 접혀있었고 한 장은 꼬깃꼬깃했다. 작년 겨울,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주저앉아있다며 나를 다급하게 불렀다. 그 시절 할머니는 휠체어에 앉다가, 용변을 보다가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방바닥에 그대로 주저앉기를 반복했다. 그럼 할아버지는 주로 집에 있는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와 병, 그 외의 내 생활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힘들어 했던 시기였다. 짜증과 눈물이 뒤섞이는 걸 꾹 참고 현관문을 열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할머니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날 바라봤다.

할머니를 다시 침대에 눕혀드리고 나면 할아버지는 나에게 용돈을 주라며 할머니를 툭툭 찔렀다. 고마워, 해봐. 진희한테 고맙다고 해야지. 그럼 할머니는 똑같이 고마워, 하고 말했다. 구여운 손녀한테 고마우면 용돈을 주는 거야. 할아버지는 삼만 원을 할머니 손에 쥐여 준 뒤 나에게 건네주라고 재촉했다. , 줘 봐. 진희한테 줘 봐. 할머니는 딴 곳만 바라봤다. 아무것도 못 들은 사람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그럴 때면 할아버지가 다시 나에게 돈을 건넸다. 사양했지만 어떤 날은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는 내가 갈 때까지 동요 없이 가만히 계셨다. 분홍색 털조끼를 입은 채로.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다시 열었을 땐 아무렇게나 넣은 지폐 때문에 호주머니가 무겁게 느껴졌다.

식탁에 사만 원을 올려놨다. 꼭 그때처럼 마음이 무거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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