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쪽 하루와 나머지 반쪽 하루

2018. 11. 13. 22:53에세이 하루한편


  낮잠을 30분만 잔다는 게 한 시간을 넘게 자버렸다. 점심을 먹고 내 방 책상에서 책을 읽다가 눈꺼풀이 무거워져 거실로 나갔다. 오후 두 시가 넘은 시간, 거실 바닥에 길게 늘어진 햇살이 날 부르는 것 같았다. 난 포근한 느낌에 이끌리듯 소파로 갔다. 편한 자세를 찾아 눕고 담요를 덮었다. 잠드는 건 나를 놓아버리는 일 같다. 나 잠깐 어디 좀 갔다 올게어딘데?글쎄, 잠깐만 다녀온다니까…… 몸과 머리의 대화랄까. 오후에 드는 낮잠은 특히 그렇다. 낮에 잤는데 깨어나도 낮인 게 이상해서 그런가, 좀 더 몽롱한 일 같다. 밤에 자서 아침이 되는 건 그렇다 쳐도, 해가 떠 있는데 자다 깨는 건 몇 시간이 지났는지 가늠할 수가 없어서 그런가.

  하루를 두 번 사는 것 같다. 오전에 한 번 깨고 다시 오후에 깨니 첫 번째 반쪽 하루와 나머지 반쪽 하루 같다. 하루를 잠으로 채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면 허탈감이 밀려올 때도 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옷을 주섬주섬 입어 산책을 하러 갔다. 얇게 입고 가서 그런지 찬바람이 목을 때렸다. 계속 걷다 보니 따스한 온기가 내 안에 퍼지는 걸 느꼈다. 잠도 자고 산책도 하고, 이만하면 아주 좋은 하루네.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그런 생각을 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하루. 어떻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냐마는, 내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일이 일어난 하루. 그래서 낮잠도 자고 산책도 한 오후. 집으로 돌아가 날 잠들게 한 그 책을 읽고 저녁을 먹었다.

  낮잠을 오래 잔 사람은 뇌 기능이 떨어진다나 뭐라나, 그런 비슷한 기사를 본 것 같은데. 그래도 아직은 괜찮겠지. 낮잠을 자고 나면 너무 기분이 좋으니까 말이야. 행복할 때 나오는 호르몬이 뇌 기능을 떨어뜨리는 세포를 무찌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뇌 걱정 없이 내일도 낮잠을 자고 싶다. 포근한 햇살이 부르는 오후에. 아주 잠시만 눈을 감고, 몸을 따뜻하게 하고. 아무 생각이 들지 않을 때, 내가 어디 다녀오는지 말할 수 없을 때, 기억이 안 나는 곳으로 가는 일 말이다. 잠에서 깨면 남은 반쪽 하루를 지내고. 나른함을 이겨내려 노력하겠지만 즐겁다. 하루에 한 번씩 즐거움을 만날 수 있다면 행복한 거겠지. 이제 나머지 반쪽 하루를 마무리하고 더 깊은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해야겠다. 읽던 책을 다시 펴고. 그럼 또 단잠에 빠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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