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없이 산 하루

2018. 11. 25. 14:12에세이 하루한편



지금 이 글은 24일 오후 923분에 적기 시작했다. 24일 글을 올리지 못한 이유에 대한 글이다. 오늘 정오에 긴급재난문자 하나가 도착했는데 내용인즉슨 이러했다. ‘[소방재난본부청] 대형화재 서대문구 충정로 3KT 건물 지하 통신구 화재 발생, 인근 주민은 통신장애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큰 화재인지 확인해 볼 겨를도 없이 인터넷이며 전화가 먹통이 됐다. 곧이어 아파트 안내방송이 나왔다. 같은 내용이었다. 집에서 충정로는 그리 멀지도 딱히 가깝지도 않았는데 재난문자까지 오다니. 핸드폰은 LTE였다가 3G였다가 서비스 안 됨을 반복했다. 어차피 멀리 나갈 일도 없었다. 낮잠을 자고 노트북을 켜 초고를 수정했다. 한글 프로그램은 인터넷이 안 돼도 사용 가능했으니 말이다(하하). 이때 까지만 해도 화재를 실감 못 했다.

블로그에 글을 올리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든 건 5시에 산책을 하면서였다. 화재 수준이 얼마나 큰지 확인을 못 했으니 막연하게 저녁때쯤 복구되겠군, 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였다. 그러던 중 B에게 전화를 걸려고 핸드폰 통화버튼을 눌렀으나 5초가 지나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다시 걸어도 통화 실패. 그래서 나름 머리를 쓴 게 공중전화를 이용하자는 거였다. 근데 부스가 어디 있더라. 평소에 공중전화부스를 눈여겨볼 이유가 없으니 어디 있는지 당연히 몰랐다. 우연히 집 근처 부스에 들어가 전화를 걸려고 했지만 지갑을 열어보니 동전이 없었다. 근처 마트에서 초코우유 하나를 사고 거스름돈을 부탁했다. 다시 걸었다. 동전을 넣어도 신호음이 가지 않았다. 계속 뚜, , . 이 소리만 반복할 뿐이었다. 다른 부스를 찾아가 똑같이 해봤으나 실패였다. 통신선에 문제가 생겼으니 공중전화까지 영향을 받나 보다. 이걸 생각 못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근처 카페에 붙여놓은 문구를 봤다. 통신 문제로 인해 카드 결제가 안 되니 계좌이체나 현금결제를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난 생각했다. 전화도 안 되고 인터넷도 안 되고, 문자도 겨우겨우 보내지고. 만약 이 상황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면 연락을 할 방법은 없겠지. 이건 재앙이다! 만약 전기까지 끊어졌다면 간단한 짐을 꾸려 집 근처 체육센터에서 밤을 지새워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통신선의 문제가 이렇게 크게 영향을 주는구나. 동일본 대지진 이후로 일본에서 미니멀라이프가 퍼졌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진정 급할 때 필요한 물건을 찾지 못한다면 소용없는 일이니까. 그래도 전기는 끊기지 않았고 읽지 않은 책과 노트북이 있으니 글은 마음껏 읽고 쓸 수 있겠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 믿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놀 거리가 아무것도 없는 옥수수밭 근처, 미국 어느 땅덩어리에서 작가가 탄생한 것도 비슷한 이유이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들고. 주변에 할 게 너무 많으면 글을 쓰지 못한다는 걸 느꼈달까. 그러니까 어느 정도 제한적인 삶은 필요함을 느끼기도 한 밤이었다.

너무 두서없이 글을 적었다. 뭐 언제는 그러지 않았냐 마는. 오늘은 눈이 와서 그런지 자꾸만 졸렸다. 저녁을 먹고 또 졸았으니. 다시 잠이 오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겠다. 지금은 오후 1021분이 막 지나가고 있다. 12시가 되면 잘 수 있을까. 앞에 말했던 대로 책을 읽고 글을 쓸 수는 있으니 이제 책을 펴야겠다. 촛불을 켜지 않아도 되니 정말 다행이다. 그나저나 이 글은 블로그에 언제 올릴 수 있을까.


*


 다음 날 오후 2시, 그러니까 25일 2시에 인터넷이 되기 시작했다. 전화는 아직도 먹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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