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그리고 자세히

2019. 1. 18. 23:58에세이 하루한편




할머니를 요양원에 모시기로 했다. 1년 반을 집에서 돌보다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내린 결정이었다. 갈수록 굳어가는 할머니의 몸을, 힘없는 팔과 다리를, 텅 빈 눈동자를, 가빠오는 숨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아빠와 고모가 요양원 시설을 보고 상담을 받으러 간 사이 난 할머니를 보러 갔다. 할아버지가 계셔서 굳이 안 가도 됐지만, 얼굴을 한 번 봐야 할 것 같아서였다. 할머니, 저 누구예요. 할머니는 세 번 만에 내 이름을 맞추셨다. 할머니, 커피 드릴까요, 커피? 고개를 끄덕였다.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주방 수납장에서 커피믹스 하나를 꺼내 컵에 부었다. 뜨거운 물을 붓고 휘휘 저어 반을 다른 컵에 덜었다. 아침 식사 후 할아버지와 커피 한 잔을 꼭 반씩 덜어 드셨으니. 빨대를 컵에 얹었다. 안방 침대로 가 할머니를 앉혔다. 뜨거운 커피를 후후 불어 식힌 뒤 할머니, 뜨거워요. 뜨거워. 내가 말했다. 남은 커피 반 잔은 내가 먹었다.


난 이제 다음 주부턴 오후 1시에 시간 맞춰 할머니 댁에 가지 않아도 된다. 더는 밥 때문에 할머니와 씨름하지 않아도 되고 대변을 치우지 않아도 된다. 답답한 마음을 추스르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이젠 내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다. 오늘은 엄마의 요양보호사 교육이 모두 끝나는 날이었고 할머니를 돌보는 건 다시 엄마의 일상이 될 예정이었으니까. 하지만 엄마도, 나도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원래대로라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게끔 여행을 떠날 생각이었다. 가족에 대한 애증과 원망, 뭐라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모든 감정을 홀가분하게 잊고 나에게 휴식 시간을 줄 예정이었다. 들뜬 마음으로 여행 계획을 세우려 했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마지막이란 단어는 언제나 마음속에 두고 있었지만, 왠지 이번엔 진짜인 것 같아서. 다시 집으로 돌아와 뭐라도 해보려고 했지만, 집중이 잘 안 됐다. 할머니가 좋아하는 커피를 타드리길 잘했다는 생각뿐이었다. 오늘 우연히 본 글이 떠올랐다.

 

그러니 만일 제가 그때로 돌아간다면 어린 제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지금 네가 있는 공간을 그리고 네 앞에 있는 사람을 잘 봐두라고

조금 더 오래 보고, 조금 더 자세히 봐두라고.

그 풍경은 앞으로 다시 못 볼 풍경이고

곧 사라질 풍경이니 눈과 마음에 잘 담아두라 얘기해주고 싶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사람을 만난대도 복원될 수 없는 당대의 공기와 감촉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철없는 저는 못 알아들을 테고 앞으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살게 되겠지요.

 

창비 50주년 축하 모임 축사에 김애란 작가가 한 말이다. 왜 하필 오늘 이 글을 봤는지 알 수 없지만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글이었다. 나에게 필요한 말이었다. 다시 못 볼 풍경, 곧 사라질 풍경인 한 사람을 떠올린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작별을 위해 마음속 인사를 늘 건네야 할 사람이. 노인들은 밤새 안녕이야. 언젠가 엄마가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언제 어떻게 돌아가실지 모른다는 뜻이야. 괜찮아 보이다가도 갑자기 숨이 멈추니까. 이제 앞으로 내가 할 일은 커피를 맛있게 타는 일. 그리고 커피를 마시는 한 사람의 모습을 조금 더 오래 보고, 조금 더 자세히 봐두는 일. 조금 더 욕심내자면 눈과 마음에 잘 담아 두는 것까지. 깨어날 수 없는 깊은 잠이 들기 전까지 매 순간 안녕을 말하고, 바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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