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근차근, 천천히

2019. 5. 5. 23:52에세이 하루한편


온종일 집에서 빈둥댔다. 주말 오전을 모두 잠으로 보냈다. 거실 소파에서 안방으로 자리를 바꿔가며 잠을 잤지만 그래도 오늘처럼 푹 잔 날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꿈을 몇 번 꿨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몽롱한 상태로 아침 겸 점심을 먹으니 나른한 오후가 찾아왔다. 베란다 창문을 열어보니 창밖에서 불어오는 후덥지근한 바람이 느껴졌다. 긴팔을 반팔로 갈아입을 만큼 더웠다. 기사를 보고 알았지만, 오늘은 한낮의 기온이 26.5도까지 올라갔다고 했다. 초여름 날씨였다나. 베란다 큰 창 앞에 놔둔 크로톤을 바라봤다. 곧게 피어난 잎 사이로 새로운 잎이 돋아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초록색 잎망울이었다. 배양토를 듬뿍 깔아주고 영양제도 꽂아준 걸 알아주는 건가. 세 개나 움트고 있었다. 며칠 전 봤던 영화 <인생 후르츠>의 내레이션이 떠올랐다.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여문다

차근차근, 천천히

 

차근차근, 천천히. 크로톤은 새로운 잎을 피워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생각이 날 때마다 베란다로 가 잎망울의 상태를 살폈다. 한동안 잎이 떨어지기만 했지 피워내는 걸 보지 못해서 반가웠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아예 크로톤의 위치를 베란다에 두었던 게 도움이 됐나 보다. 이제야 살만한가 보다. 다른 가지에 피어난 건 없나 이리저리 살펴봤다. 나도 모르게 어느샌가 빨리 자라라, 입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식물은 항상 천천히 자기만의 속도로 간다는 걸 알면서도 재촉하고야 마는 거다. 잎이 언제쯤 다 피어날까 생각하다가 나도 모르게. 그래서 항상 배운다. 계속 뭔가를 피워내는 크로톤에게, 자연스레 해가 길어지고 기온은 올라가는 초여름의 날씨에게. 모든 자연에게. 나에게 건네는 목소리를 듣는다. 우린 차근차근, 천천히 하고 있어.

나도 내가 가야 할 곳을, 내가 펼쳐낼 이야기를 천천히 생각해본다. 서툴러도 차근차근해나가면 언젠간 닿아있겠지.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사는 삶, 그 안에서 자연을 통해 배우고 자라나는 나.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잘 찾아가는 중일 거야. 차근차근, 천천히. 나의 잎을 피워내는 중일 거야. 재촉하지 않아도 언젠간 이만큼 자라 있을 거야. 그러니 불안해하지 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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