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 달 살기 14. 열한 시 같은 일곱 시 반

2018. 9. 2. 23:53여행을 기록하자/제주도 한달살기

[14]
이중섭 문화 거리(이중섭 미술관-생가)-황우지 해안(선녀탕-바닷가 절벽)

이중섭 미술관은 현재 2층 공사로 인해 1층만 개방하여 무료로 전시를 봤다. 소와 은지화 작품이 있었는데, 강렬한 색채의 그림보다 더 기억에 남는 건 ‘소의 말’이라는 그가 쓴 시였다.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 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그는 제주에서 1년 정도 살았다. 돈이 없어 담뱃값 안에 든 은색 종이에 그림을 그렸고, 1.4평의 방 한 칸에서 네 식구가 지냈다. 주로 고구마와 게를 삶아 먹으며 끼니를 때웠고 정신분열 증세를 겪다 40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살았었다는 초가집을 직접 가봤다. 그가 쓴 시가 벽에 걸려있었다. ‘소의 말.’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이라는 막연한 말이 그의 입을 통하여 내게 닿으니 가슴이 먹먹했다. 정말 사는 것은 누구나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같이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거구나, 생각했다.





황우지 해안에선 선녀탕과 이름 모를 절벽을 갔다. 외돌개를 보기 전 들를 수 있는 절벽이었다. 발을 한 번 헛디디면 바로 물속으로 떨어질 것 같은 그곳에서 가만히 앉아 바다를 봤다. 잠시 동안 하얗게 부서지고 넘실거리며 물결치는 파도를 봤다. 하늘과 물이 맞닿았다. 수평선은 언제 봐도 질리지 않는다. 한동안 말없이 쳐다보다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시간을 보니 일곱 시 반이었다. 집까지는 한 시간 이십 분이 걸리니 도착하면 아홉 시가 넘을 거다. 이곳은 일곱 시가 넘으면 노을이 지고 주변이 빠르게 어두워진다. 삼십 분만 지나도 어둑어둑했던 하늘이 깜깜해지고 가로등이 없는 곳은 말 그대로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다. 그래서 어둠이 시작되는 일곱 시 반이면 집 생각이 간절하다. 얼른 집에 가야 하는데, 마음이 급해진다. 서울에선 밖을 돌아다니다 열한 시가 되면 그제야 집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이곳은 그 시간이 훨씬 이른 일곱 시 반이다. ​열한 시와 일곱 시 반, 너무 다른 시간이다. 그 다름에 익숙해져 간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 두렵지만, 그리울 것 같다. 까만 하늘과 이곳의 일곱 시 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