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 달 살기 15. 찌질한 인간의 고된 시골살이

2018. 9. 3. 23:58여행을 기록하자/제주도 한달살기

[15]
유람위드북스

제주시 한경면 조수리에 있는 조용한 책방, 유람위드북스에 다녀왔다. 일부러 고양이 람이가 출근하는 날인 월요일에 맞춰서 찾아갔다. 책도 보고 람이도 볼 수 있어 좋았다.




오늘은 <찌질한 인간 김경희> 라는 책을 읽었다. 자신의 찌질함을 사실 그대로 적어 내려간 책이다. 글을 읽으며 계속 드는 생각은 ​‘나만 찌질한 게 아니었구나’였다.

몇 달 전 작가가 직접 만든 책을 판매하는 퍼블리셔스 테이블이란 출판 마켓에서 오키로북스 책방 사장님과 김경희 작가가 하는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일부러 시간을 내 찾아간 것인데, 그때는 이 책을 몰랐다. 관객들은 나와 같이 책방을 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었다. 책방의 간단한 소개와 지금까지 걸어온 발자취를 간단하게 설명한 후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어떻게 하면 책방을 낼 수 있느냐, 에 대한 질문이었다. 김경희 작가는 무척이나 단호하게 말했다.
“2년 동안 먹고 살 수 있는 돈 없으면 시작하지 마세요. 저는 누가 책방 하고 싶다고 하면 항상 말리는 편이에요.”
작가는 어떤 이야기든 막힘없이 술술 이어나갔다. 단호한 말투에 나는 그럴 돈이 아직 없는데 그래도 하면 안 되는 걸까,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서인지 ‘자기 할 말은 다 하고 사는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의심 없이 자리 잡았는데 이게 웬걸, 책을 읽어보니 나랑 똑같은 찌질한 인간이었다.



카페에서 시끄러운 사람한테 조용히 해달라고 말 못 하고 (그것도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심기를 거슬리게 한 사람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지 못한다. 뒤돌아서 개미 같은 목소리로 욕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하지 않냐며 내 편이 되어달라 얘기한다. 무엇보다 남과 나를 비교하는 게 닮았다. 이 부분에서 나도 내가 찌질하다는 걸 인정했다. 찌질한 인간이라는 건 평범하단 뜻이다. 내가 생각하기엔 그렇다.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평범해서 일 거다. 그 뜻은 결국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는 얘기겠지. 타인의 삶을 멀리서 보면 달라 보이지만 가까이 보면 그렇지 않듯이. 결국 ‘평범한 인간 김경희’라는 말로 들린다. 아니 사실 ‘평범한 인간 김경희(들)’의 이야기다. ‘들’에 포함된 사람 여기 하나 있다.

아니다, 아무래도 나는 평범한 인간에서 다시 찌질한 인간으로 고쳐야겠다. 이유인즉슨 배고픔 때문이다. 한 시쯤 도착한 책방에서 책을 읽으니 세 시가 넘어 쓰려오는 배를 부여잡고 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밥집을 찾았다. 내가 여태껏 가봤던 제주의 시골 마을 중에서 가장 한적하고 가장 밥집이 없는 곳이 조수리, 이곳이란 걸 깨달았을 땐 절망적이었다. 아무리 봐도 식당이 없었다. 죄다 카페였다.
몸엔 힘이 없고 어지러운 느낌이 몰려오니 제주의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힐링이고 뭐고 우선 내 배부터 채우자!’ 낭만 따위 집어 던져버렸다. 다행히 간신히 찾은 식당에서 허겁지겁 먹었다. 이만 오천 원이 나왔다. 어제 먹은 갈치조림은 삼만 팔천 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주린 배를 채웠으나 밀려오는 건 허무함이었다. 제주는 식비가 비싸도 너무 비싸다. 기본이 만 원이다. 어쩌다 팔천 원 하는 식당을 찾으면 다행이다.
휴,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어졌다. 뭐니 뭐니 해도 밥은 엄마가 만들어 주는 집밥이 최고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차려 먹었다. 매일 마트에 들러 뭔가를 사도 자꾸만 필요한 게 생겼다. 지출 내역만 잔뜩 쌓인 통장 내용과 밤이 되면 온통 깜깜해져 나갈 수가 없었던 답답함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어제까지만 그리울 것 같은 이곳의 밤이었는데. 아, 오늘은 제주 시골살이가 조금 고된 날이다.

내 인생의 최고의 순간 일 거란 확신을 하고 제주에 내려왔는데, 이곳에도 나름의 고충이 있다는 걸 느꼈다. 행복하지 않은 순간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은 건데, 귀를 막아 듣지 않으려 했던 것 같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 시골 생활에 기대를 조금씩 버려야겠다. 기대를 버리면 어느샌가 다른 무언가로 채워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