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은 핑계였는데

2018. 10. 19. 23:06글쓰기 우당탕탕



온종일 집중이 안 됐다. 이럴 때는 억지로 밖에 나가서 써야 하는데. 잠깐 산책을 다녀온 게 다였다. 가족 모두가 외출할 때를 기다렸다가 쓰기를 기다리는데, 오늘은 그게 잘 안 되는 날이었다. 공원으로 산책하러 가 벤치에 앉아 책을 읽었다. 편의점에서 밀크티를 하나 사 옆에 두고. 제법 날씨가 쌀쌀하지만, 햇빛을 정면으로 받으면 외투를 벗을 만큼 훈훈한 두 시였다. 눈이 부셔 햇빛을 등진 건물 앞 벤치에 앉았다. 어디론가 가는 사람들 틈 사이에서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다시 집, 엄마가 외출하고 난 5시 반이 돼서야 뭐라도 써볼까 했지만, 마음이 잡히지 않았다. 책도 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티브이를 켰다. 재밌게 봤던 애니메이션 영화를 다시 볼까 하다가 예전에 즐겨보던 예능을 봤다. 오랜만에 보니 재밌었다. 티브이를 보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 지금 내가 이럴 때가 아닌데. 불안한 마음보다 의지는 크지 않았다. 아예 저녁상을 차려다가 보면서 먹었다. 그러다 티브이를 끄고 핸드폰을 했다. 시계를 봤다. 7, 8, 99시가 넘어서야 책상 앞에 앉았다. 오늘은 뭘 써야 할까. 쓰려고 계획한 글을 한자도 쓰지 못했다. 오늘의 짧은 에세이는 어떻게든 써서 올려야 하니 일단 앉았다. 한 문단을 썼다가 다 지우고, 다른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로 다시 한 문단을 채웠다. 또 지웠다. 몇 번을 반복하다 지금 여기까지 쓰고 있다.

  오늘 점심을 다 먹고 식탁에 앉아 아빠에게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버렸다. 비밀이었는데, 말해버렸다.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글 쓰는 것도 잘 안 되면 혼자만의 일로 끝나는 거였는데. 이미 뱉어버렸으니 더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독립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나온 거라 설득시킬 만한 타당한 이유가 필요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말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는데. 엊그제 저녁 외식 자리에서 아빠는 술 한 잔 걸친 채 앞으로 무얼 할 거냐, 결혼은 언제 할 거냐, 어떤 직업이 좋으니 그걸 하는 게 어떠냐고 말했다. 농담과 진담 사이에 꺼낸 얘기였지만 내 신경을 건드리는 말이었다. 아빠는 항상 그랬다. 내가 뭔가를 해보려고 애쓰는 걸 알면서도 다른 직업을 가지라 말했다. 나는 여기까지 나와서 꼭 그런 얘기를 해야겠냐고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가게 내부는 출입문을 닫아 소리가 울렸다. 국물이 끓는 소리와 다른 사람이 내는 소음들 사이로 말했다. 난 지금 하는 게 있지만 말하고 싶지 않다고. 내가 뭘 하고 싶다고 말하면 아빠는 딴지를 걸 게 아니냐고. 싫은 소리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렇게 돼버렸다. 어두운 가게 안, 노란 조명 아래서 본 아빠의 모습이 낯설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점심을 늦게 든 엄마가 방에서 나와 아빠 옆자리에 앉았다. 뭘 한다고? 물었다. 나는 에둘러 말했지만, 아빠는 글을 쓰고 싶대, 라고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두 분이 따로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애써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1시가 되자 엄마는 할머니 댁에 갈 채비를 했다. 아빠도 담배를 피우러 나가니 같이 가자며 걸음을 옮겼다. 20분쯤 됐을까? 정확히 얼마나 걸렸는지는 몰라도 무척 길게 느껴졌다. 밖에선 분명 내 이야기를 하고 있으리라. 나는 방 안에서 잠자코 있었다. 다시 아빠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는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나는 이 상황이 조금 어색하고 불편해져 산책을 하러 간다며 집을 나섰다.

  내가 글을 쓴다는 게 단지 있어 보이려말하는 게 아님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또 백수의 변명거리도 아니고 그동안 마음에 품어 왔던 것을 내 비추는 것뿐이니 한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줬으면 좋겠다. 음악을 하겠다고 했을 때, 왜 그런 걸 하냐고 물었던 아빠의 모습이 떠올랐다. 졸업하고 잘 안됐을 때 그렇게 하지 말랬잖아, 라고 말하던 것도. 다시 또 그 상황이 반복될까 무서웠다. 이도 저도 아닐까 봐. 알리지 않고 혼자만 썼다면 가족들을 속일 수 있었을 텐데. 애써 열심히 했던 시간을 그냥 푹 쉬었어, 생각을 좀 해봤어, 라는 식으로 둘러대며 없던 일로 만들었을 텐데. 이제 그러지 못한다. 나는 그게 두려웠다. 다시 또 실패할까 봐. 그래서 말하지 않으려 했던 거였다. 그래서 피했다. 산책을 핑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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