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샤프 한 자루 때문에

2018. 11. 14. 22:31에세이 하루한편



  조용한 공간이 좋은데 집은 너무 시끄럽다. 특히 아빠랑 같이 있을 때면 조용한 분위기가 확 깨져버린다. 윗집에선 쿵쿵대고 강아지 금복이는 컹컹 짖는다. . 조용히 있고 싶다. 오늘은 장판을 교체했다. 원래 있던 것 위에 덮어씌웠으니 한 겹 더 깔았다고 해야겠다. 거실에 있는 짐이며 주방에 있는 잡동사니들을 싹 치웠다. 며칠 전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방 안에 쑤셔 박았다. 길었던 두 시간이 지나고 나니 12시 반이 넘어있었다. 10시에 와서 12시 반에 떠났으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일할 때면 내 이름 먼저 부르는 아빠와 간병인 권사님에게서 온 전화가 울리는 엄마의 핸드폰, 자꾸만 울리는 장판 업체 권사님의 핸드폰, 지독한 접착제 냄새, 풀 냄새까지. 정신이 없었다. 점점 짜증이 났다. 무슨 일만 하면 혼자서 하지 않고 꼭 보채며 날 부르는 아빠가 미웠다. 맨날 같은 문제로 싸웠다. 오늘도 반복이었다.

  모두 자신을 부르는 곳으로 돌아가 혼자 남겨진 집 안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독한 냄새를 빼려고 창을 활짝 열어 놓은 채였다. 찬바람이 들어와 옷을 껴입어야 할 정도였다. 밖을 보니 레고처럼 빼곡한 아파트들이 보였다. 예전에 교회에서 유치부 아이들과 같이 만들던 레고 놀이 같았다. 건물이 한 치 오차도 없이 시야를 꽉 메웠다. 답답했다. 가끔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할 때가 있다. 모두 같은 모양의 구조로 된 집 안에서 빨래를 돌리고 밥을 먹고 옷을 갈아입고 출근을 하고 외출을 하고 씻고 자고를 반복하며 살겠지. 밤이 되면 맞은편 아파트에 사람이 훌라후프를 돌리는 게 보일 정도였다. 웃통을 벗고 다니는 아저씨를 볼 때도 있었고. 그럴 때면 얼른 커튼을 치곤 했다. 베란다에 둔 여행용 가방에 붙어있는 태그가 보였다. 김포. 그 순간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조용한 데로, 아주 멀리멀리 떠나고 싶었다.

 

  눈을 감고 있으니 새소리가 들렸다. ? 가끔 창밖으로 검은 물체가 휙 하고 지나가는 걸 봤던 게 생각났다. 아파트는 소리가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니 분명 밑에 있는 나무 어딘가에서 지저귀는 새소리였을 거다. 난 그걸 들으며 조금 안심했다. 그래, 여기에도 새가 있었지. 소음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주체할 수 없는 충동에서 한 걸음 벗어난 기분이었다. 산속에 들어가 사는 사람의 기분을 알 것 같다. 아래는 너무 시끄럽고 바쁘니까. 하지만 아직 그럴 용기는 안 난다. 더 큰 고난을 만나거나 생각이 짧았다면 갈 수 있었겠지. 낮잠을 잤다. 어제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인 잠이다. 내 몸이 회복을 원해서 자는 잠이었다. 자고 일어나 할머니 댁에 가 할아버지가 오실 때까지 기다렸다. 4시 반쯤 할머니 댁을 나섰다. 도서관에 가야 했다.

  조용한 도서관은 나에게 새소리만큼 좋은 곳이다. 모두가 각자의 세계에 몰두해 책장 넘기는 소리만 내는 곳. 가끔 정적을 깨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전화벨 소리가 울릴 때 말고는. 그렇게 세 권의 책을 반납하고 세 권의 책을 대출했다. 온갖 짜증이 나고 날이 설 땐 걷는 것도 좋다. 걸어서 도서관에 가는 거면 더 좋고. 집에 돌아와서 우연히 샤프를 발견했다. 장판 아저씨가 줄자를 재고 적다가 정신없이 일 한 뒤 아무 데나 놓고 간 거였다. 신발장 옆 붙박이 장 위였다. 연필심처럼 굵은 심이 들어간 샤프였다. 예전에 입시 준비할 때 내가 쓰던 심이랑 비슷했다. 그건 심이 대각선 모양이었다면 이건 동그랬다. 엄마, 이거 안 찾아줘도 될까? 물었다. 한 시간 걸려서 왔다는 데 샤프 한 자루 찾으러 오진 않겠지. 생각하며 수첩에 내가 한 말 그대로 사각사각 받아 적었다. 고작 샤프 한 자루 가지고.

  고작 샤프 한 자루 가지고. 고작 이 정도 일 때문에 방황하는 내가 보였다. 이제 엄마 아빠랑 살 일은 더 없을 텐데. 인생사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지만, 내년 3월 이후에 내가 진짜로 독립하게 되면 이렇게 지지고 볶고 하는 일도 없을 거야. 그러니까 이 시기를 최악으로만 만들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냥 다시 돌아봤을 때 후회는 하지 않도록 만들자고. 나 혼자인 집으로 돌아갔을 때 엄마 아빠한테 미안한 마음 들게는 하지 말자며 샤프를 내려놨다. 고작 이 정도에 무너지지 말자. 고작 이 정도에 마음 쓰지 말자. 고작 이 정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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