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 없이 산다

2018. 11. 18. 23:11에세이 하루한편


잠을 잘 못 자거나 몸이 피곤하면 잇몸이 붓는다. 으슬으슬 추운 느낌에 위층에서 싸우는 목소리가 들려 깼다. 얼마간 선잠을 자고 일어났다. 난 정말 추운 걸 못 견디겠다. 추운 날씨에 어제 돌아다녀서 그런지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았다. 평소처럼 소금물로 입가심을 하고 식탁 위에 있는 과일을 몇 개 주워 먹었다. 오늘은 뭘 하면 좋을까, 뭘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티브이를 틀었다. 주말엔 늦잠인데. 아홉 시 반, 생각보다 일찍 깼으니 여유를 부려야지. 따뜻한 차 한 잔이 간절했지만 잎 차가 다 떨어졌으니 마실 게 없었다. 아쉬운 대로 난로를 켜고 소파에 앉았다. 리모컨 스위치를 누르다 보니 영화 <신비한 동물 사전>이 방영 중이었다. 며칠 전 극장에서 후속편인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를 본 참이었다. 기억도 되살릴 겸 보기 시작했다.

점심을 먹으면서 봤다. 그릇에 반찬과 밥을 담고 낫토와 물 한잔을 티브이 앞 책상 앞에 가져다 놨다. 영화가 끝나니 졸음이 밀려왔다. 낮잠을 자볼까 싶어 누웠지만, 또 위층에서 야단이었다. 김장을 하나 보다. 그렇게 누워 있다가 오늘은 커피를 마셨다. 커피믹스 한 잔에 남은 빵을 곁들여 먹었다. 오후가 지나가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난 이후엔, 그러니까 적어도 네 시 전에는 차 한 잔을 마셔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흘러간다는 생각이 드니까. 오늘은 커피였지만 나쁘지 않았다. 컴퓨터를 켜 주문할 차를 검색했다. 이번에는 말차를 좀 먹어보고 싶은데, 말차엔 도구가 필요했다. 다관이랑 찻잔도 사려던 참이었는데 돈이 많이 깨질 것 같아 냉큼 결제하지 못했다. 그렇게 몇 시간 인터넷 세계를 돌아다녔다.

저녁을 먹고 엄마와 함께 안방에 놓을 서랍장과 화장대를 검색했다. 차를 조금 더 찾아보다 지쳐 컴퓨터를 껐다. 눈이 뻐근했다. 오늘은 밖에 나가지도 않고 집에만 있었다. 정말 별일 없는 하루다. 온종일 티브이와 인터넷을 한 게 다다. 글을 쓰려고 해도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다. 차 한 잔 옆에 있었으면 달라졌겠지만. 눈 깜짝할 사이 밤 열한 시다. 씻고 잘 시간이다. 어제도 그렇고 요즘처럼 별일이 많았던 적은 처음이다. 시도 때도 없이 화가 나고 가족들과 부딪히고 내 마음을 풀어주려 어딘가로 향하고. 걷고 쓰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그러니 오늘만큼은 별일 없이 지나가도 괜찮다. 아무것도 한 게 없어 불안한 마음쯤이야 상관없다. 무엇을 하지 않아도 족하다. 하루쯤은 별일 없이 사는 날도 있어야 또 살아가지.

'에세이 하루한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만 없어 고양이  (0) 2018.11.21
그 단어만 아니었어도  (0) 2018.11.19
몸짓  (0) 2018.11.16
고작 샤프 한 자루 때문에  (0) 2018.11.14
반쪽 하루와 나머지 반쪽 하루  (0) 2018.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