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단어만 아니었어도

2018. 11. 19. 23:06에세이 하루한편


평일 오후 두 시를 넘은 시간 합정역 출구 계단을 오르던 중이었다. 계단 중간에서 아주머니가 오른손에 뭘 쥔 채 앉아있었다. 나에게 말을 걸었다. 엄마 좀 도와줘, 엄마 좀 이거 사줘. 통화 중이었던 나는 이어폰 한쪽을 빼고 물었다. 이게 뭐예요? 호두과자야. 합정역 근처 코코호도가 있는데 거기서 사 온걸 다시 포장해서 파는 걸까, 영문은 모르지만 호두과자였다. 투명 포장지에 네 개가 들어있었다. 딱 봐도 눅눅해 보였다. 얼마냐고 묻자 이천 원이라고 했다. 내가 잠시 뜸을 들이자 또다시 엄마 좀 도와줘, 엄마 도와줘. 애원했다. 왼손에 걸어놓은 검은 비닐봉지엔 천 원짜리 한 뭉치가 있었다. 역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나처럼 애원했을까. 하나만 주세요, 하자 두 개 사라며 내밀었다. 괜찮아요, 몇 번 실랑이했다. 그냥 갈까 하다가 그럼 두 개 주시라며 거스름돈 받을 수 있어요? 묻고 만 원짜리 한 장을 내밀었다. 아주머니는 오천 원 한 장을 줬다. 두 개 샀으니까 사천 원이잖아요. 그러니까 육천 원 주셔야죠. 그제야 천 원 한 장을 더 꺼냈다. 아주머니는 연신 고맙다며 인사를 했다. 얼굴이 조금 밝아져있었다.

지하철에서 종이를 돌리는 사람들에게 껌을 사거나 역 주변에서 할머니가 파는 빵을 산 적은 있지만 이렇게 애원하는 목소리를 내진 않았다. 역에서 학생 미안한데 천 원만 주면 안 될까, 이천 원만 주면 안 될까, 하는 이상한 권유를 듣기도 했지만 이런 목소리는 처음이었다. 애가 타는 듯 간절한 목소리였다. 앉아서 있는 힘껏 손을 뻗으며 애원했다. 아주머니는 부스스한 단발머리에 메마른 얼굴이었다. 화장기 없이 푸석한 얼굴. 피곤이 서려 있는 듯했다. ‘엄마라는 단어가 날 붙잡았다. 어찌 됐든 그분을 도왔으니 뿌듯해야 하는데, 조금 헷갈렸다. 아니라면 정말 죄송하지만 내가 이용당한 건 아닌가, 하는 의심 때문이다. 애써 지웠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정말 누군가의 엄마일지도 몰랐다. 피곤한 표정을 보자 우리 엄마가 생각났다. 그래서 살 수밖에 없었다. 다 거짓말이었더라도 엄마가 생각났는데 어떡하냔 말이다. 엄마라는 단어만 듣지 않았어도, 사지 않았을 거다. 엄마라는 단어만 아니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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