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 같은 날

2018. 11. 30. 22:58에세이 하루한편



  11월의 마지막 날이다. 한 달의 끝을 이렇게 보내고 싶지 않았는데 무의미하게, 시간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는 허탈감만 안고 끝내는 중이다. 한 달의 마지막 날이라고 꼭 시간을 잘 써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이왕이면 잘 정돈된 상태면 좋지 않은가. 정리정돈을 잘하면 상쾌한 기분이 드는 것처럼. 엄마와 실랑이를 해 마음이 어지러웠다. 지겨운 실랑이. 상한 감정과 소모한 시간이 아깝지만, 매번 반복하게 된다. 그럼 또 시끄러운 이곳이 너무 불편하게 느껴지고 나를 괴롭히는 다양한 소음들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진다. 감정적으로, 청각적으로 모두 괴로운 상태가 돼버린다. 제발 좀 조용히 해달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 그럼 나는 또 불쑥,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렇게 어지러운 마음으로 노트북을 가방에 넣고 집을 나섰다.

  집 근처 카페에서 글을 쓸 참으로 나와 옷차림이 가벼웠다. 산책을 조금만 하다가 카페에 가야지, 가서 글을 써야지 마음을 정했지만, 발걸음이 멈추지 않았다. 40분 정도 걸어 책방에 갔다. 책장에 눈여겨본 책 한 권이 꽂혀있는 걸 보고 손에 집어 들었다. 여행에 관한 산문집이었다. <언젠가, 아마도>라는 책. 그냥 사고 싶었다. 여행, 가고 싶으니까. 매번 이런 식이다. 엉망이 된 마음을 풀어주려 나에게 선물하는 식. 자꾸만 뭔가를 사게 된다. 오늘은 책이었다. 구매한 책을 가방에 넣고 웅크린 몸을 애써 펴고 걸었다. 갔던 길을 다시 되돌아왔다. 다시 집. 아무도 없는 집으로 들어가 관심 없는 드라마 두 편을 연속으로 본 뒤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그리고 쓰는 글. 오늘 하려고 정해둔 글은 쓰지 못했다. 사실 쓰는 것보단 고치는 것에 가깝지만. 시계를 보니 오후 104226초가 막 지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일초, 이초를 보고 있자니 시간을 잘 쓰지 못했다는 허무함이 밀려온다. 이미 흘러버린 시간은 어쩔 수 없으니 내일을 더 잘 살기로 다짐한다. 그리고 너무 많은 시간을 짜증 내는 것에 쓰지 말자고도. 말 그대로 시간이 아까우니까. 소중한 시간은 기뻐하기에도 부족하니까. 길을 걷다 우연히 버지니아 울프가 쓴 문구를 봤다. 그녀는 85년 전, 이렇게 썼다.

 

어제는

보람 있는 하루였다.

 

글 쓰고

산책하고

책을 읽었다.

 

-1934년 일기, 버지니아 울프

 

나 또한 그렇게 살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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