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할 수 없는 점심

2018. 12. 15. 23:58에세이 하루한편


 

  오늘은 내 시간을 내 마음대로 썼다. 얼마 만에 하루를 온전히 내 마음대로 쓰는 건지 모르겠다. 할머니를 보살피지도 않고, 누굴 만나지도 않고 나 혼자서 오후를 보냈다. 점심을 먹은 뒤 두 시부터 여덟 시까지. 그 시간 동안 사람들 틈에 섞여 길을 걷고 서점과 책방에 들러 책을 들춰보고 그동안 사고 싶었던 가방을 샀다. 집에 돌아와 영화도 보고. 내 시간을 내가 쓰고 싶을 때 내 의지대로 쓸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아주 많이.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온전히 나만 생각했다.

  점심땐 할아버지 생신으로 가족들이 모여 식사를 함께했다. 일하느라 지방에서 올라온 오빠가 명함을 돌렸고, 사촌 언니의 취업 소식을 축하하는 덕담이 오갔다. 그중에서 난 나를 뭐라고 소개해야 할까, 지금 이 시기를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냐고 묻는다면 글을 쓰고 있긴 한데 누가 인정해주는 글이 아니라 혼자 쓰는 글이라서. 작가가 직업도 아니고. 책을 만들고 있긴 한데 서점에서 파는 책도 아닐 거고. 아직 다 만들어지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다. 할머니들 돌보면서 이따금 내가 왜 이러고 있나,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는 중이라 힘들어 죽겠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얼굴이 핼쑥해 보인다는 말과 함께 내 안부는 지나갔다.

  한겨레 손바닥 문학상에 응모했던 내 글이 뽑히지 않았다. 오늘 발표가 나는 줄 알았던 것이 월요일이었다는 걸 알았던 건 어젯밤이었다. 대상과 가작 명단에 내 이름이 없다는 걸 알았다는 것도. 그래서 더 글을 쓰고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숨길 필요도 없지만 알릴 필요도 없는 것 같았으니까. 어른들한테 괜한 소리를 듣고 싶진 않았던 것도 있고. 음악을 만들던 때도 어른들은 항상 그랬다. 콧방귀를 끼며 재능은 있냐고 물었다. 뭐 그런 걸 하냐고, 왜 그런 과에 갔냐고 말하는 걸 들어왔으니 말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좋게 말하면 어디가 덧나는지.

 

  그렇게 날 소개할 수 없는 점심을 보냈다. 그래도 오후 시간은 내 뜻대로 썼으니 괜찮았다. 이 시간이 지나면, 나만 오랫동안 생각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마련하자고 마음먹었다. 그게 어디든 두려워하지 말고 내가 가고 싶은 곳이면 가고 혼자 있는 시간을 보내자고.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잠시 편안해졌다. 그리고 힘들고 괴로울수록 열심히 글을 쓰고 날 놓지 말자고, 내가 누구인지 잊지 말자고도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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