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하면 괜찮은 크리스마스이브

2018. 12. 24. 23:59에세이 하루한편



  어제 자기 전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책 만들기 수업이 끝남과 동시에 긴장의 끈이 탁, 끊어진 탓도 있고 연말을 실감해 막연한 걱정이 들기도 해서. 새해가 밝아오면 난 한 살 더 먹을 테고 딱 그만큼 책임감을 가져야 할 텐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식의 막연한 생각 말이다. 몇 달 전 카페 화장실에 걸려있던 일 년 달력을 본 게 생각났다. 20181월부터 12월까지 죽 이어진 달력을 보며 눈으로 세어봤다. 1월부터 7월까지. 1, 2, 3, 4, 5, 6, 7. 달력 절반을 차지할 시간 동안 난 뭘 했지. 회사에 다닌 거 말고 뭘 했더라. 회사-작업실 또다시 집-회사, 그러다가 집-회사--회사만 반복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왜 일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하루도 끊이지 않던 때가.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이 날 안심시켰지만 그럴수록 마음이 말라갔다. 온통 다 무미건조했다. 다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세상을 감흥 없이 사는 게 너무 무의미해서. 그만뒀다. 그렇게 12. 24일이다.

  그래서 회사 때려치우고 뭐 먹고 살길이라도 찾았냐고 물어본다면 그건 아니다. 그래서 막연한 걱정이 드는 거지 뭐. 내 인생 최초 장기여행인 한 달 동안 제주도에서 살아보고 책도 만들어보고 내 인생 처음으로 글도 무지막지하게 써보고 했는데, 그래도 불안한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래도 그 기분을 떨치고 마무리해야 할 일들을 생각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수첩에 하나씩 적었다. 독립 출판으로 낼 내 책 <겨우 한 달일 뿐이지만> 글을 수정하고 주문을 넣었다. 오전 11시부터 눈이 빠지게 읽고 또 읽었다. 읽을 때마다 마음에 걸리는 문장이 있어 더 읽기 좋게 만드는 작업을 반복하다 보니 지겨웠다. 도대체 몇 번을 읽는 건지 모르겠다. 이젠 다른 책을 읽고 싶을 정도다. 이만하면 됐다, 100권 주문을 넣었다. 표지 디자인 때문에 인쇄소 쪽에서 전화가 와 굵은 검은색 테두리를 다 없앴다. 최종 표지는 이렇게 할 예정이다. 거울을 보니 왼쪽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예전과 다른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던 것처럼 난 그렇게 살고 있다. 이따금 불안이 날 찾아오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당당하게 맞이하기로 한다. 불안하다는 걸 인정하고 난 어떨 때 불안하고 불행하다고 느끼는지 생각해보고. 한 살 한 살 더 먹을수록 내가 후회하는 행동을 하지 않으며 살자고 다짐한다. 더하기가 아니라 빼자고.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죽어도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으며 살자고. 그러기 위해 내가 견딜 수 있을 만큼만 일하자고. 지금은 힘을 기르는 시기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으면서 기르는 힘 말이다. 기르는 김에 열심히 키우자. 그 힘으로 다시 살아갈 수 있게. 그렇게 살다 보면 오늘처럼 안 하던 짓 하면서 하루를 보낼 수도 있다. 꼬박 하루 동안 내 글만 읽고 보낸 날이었으니. 크리스마스이브를 이렇게 보내는 건 처음이다. 내 글을 읽느라 시간을 다 써버린 크리스마스이브라, 나쁘지 않다. 불안하더라도 이게 낫다, 방금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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