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까지 귀하지 않은 건 아니야

2019. 2. 9. 23:58에세이 하루한편



글벗서점에 다녀왔다. 그동안 구경하러 몇 번 다녀온 적은 있지만, 오늘은 책을 팔러 가는 거였다. 만화책<오디션>. 이 책을 산지 벌써 몇 년이 된 건지도 까마득하다. 최소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반주 레슨 상담을 받으러 간 날이었다. 레슨은 선생님의 집, 방에서 했다. 상담도 그랬다. 교회 전도사님의 사촌이라 선생님의 방에 세 명이 있었고 중학생이던 나는 쭈뼛거리며 어색하게 웃고만 있었다. 그때 만화책이 대화 주제로 떠올랐고 선생님은 자신이 아끼는 책이라며 <오디션>을 소개했다. 그때 처음 <오디션>을 알게 됐다. 음악을 주제로 한 내용인 데다 잘 정돈된 10권이 멋져 보였다. 마치 음악가의 상징같아 보였다. 음악 하는 사람은 다 좋아하고 소장해야 하는 바이블처럼 보였던 거다.

그렇게 <오디션>에 대한 로망을 품고 있었을 즈음 우리 동네 비디오 가게 겸 만화방이 폐업했다. 역으로 가는 큰길가에 있었던 가게였다. 커다란 글씨로 폐업이라 적힌 걸 보니 아쉬움이 먼저 들었지만 그 옆에 만화책 전 권 싸게 팝니다.’라는 말은 반가웠다. <오디션>을 찾았다. 10권을 구매했다. 얼마 주고 샀는지는 잊어버렸다. 3만 원인가. 꼭 사고 싶었으니 흔쾌히 지갑을 열었던 게 생각난다. 빨간 노끈으로 질끈 묶어 집으로 데려온 순간엔 어떤 시험을 통과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도 이제 음악가의 자질을 하나 갖췄군. 나도 음악으로 밥 벌어먹으며 살 수 있겠어. 진짜 이렇게 막연하게 생각했다. 레슨을 한다는 게 너무 멋져 보였고 그 모든 건 다 <오디션>과 겹쳐 보였다

그 뒤로 몇 번 읽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음악의 재능이 있는 몇 사람이 모여 밴드를 만든 뒤 오디션을 본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생각만큼 큰 감흥은 없었다. 술술 읽혔지만, 워낙 로망이 컸던 터라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었다. 그게 내 인생 만화책도 아니었고. 선생님에게 의미가 있었던 것처럼 나에게도 어떤 동요가 있길 바랐다. 그래, 음악은 이렇게 하는 거지! 나도 당장 오디션을 보러 가야겠어! 이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뭔가 꿈틀거리는 거 말이다. 시간이 지나서야 알았다. <오디션>은 남에게 보여주기식으로 갖고 있던 물건이었다는 것을.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방을 정리하다가 이제는 이 책을 보내줘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 오늘 서점에 간 거다. 가기 전 서점에 전화해 책을 매입하는지 물었다. 상태가 괜찮다면 한 권에 500원을 줄 수 있다고 했다.

내 책 상태가 심각하다는 건 다른 책을 보고서야 알았다. 사실 글벗서점에 가기 전 들른 헌책방을 구경하다 책의 상태를 보여주고 가격을 물었는데, 사장님은 뜨악하며 이거 누가 사고 싶겠냐며 2천 원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말했다.

이거 그렇게 귀한 책 아니에요.”

할 말이 없었다. 전 권이 다 노랗게 때가 타고 그중에서도 1권은 좀 울긴 했지만,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글벗서점에 팔기로 했으니 그쪽으로 가서 물었다. 똑같이 2천 원 밖에 줄 수 없다고 했다. 1권은 폐기해야 할 정도라고 했다. 그냥 다시 집으로 가져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난 또 머쓱한 웃음으로 그럼 그렇게 해달라고 한 뒤 책방을 구경하고 나왔다


나에겐 귀한 책이었는데. 어릴 적 로망이 2천 원으로 바뀌었다. 추억이 천 원짜리 두 장이 됐다. 그렇다고 해서 추억까지 귀하지 않은 건 아니다. 나도 그 책을 보는 사람이라는 걸 티 내고 싶어 하던 그때가 떠올랐다. 타인의 취향을 흉내 내고 싶어 했다. 그렇게 하면 진짜로 그 사람처럼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나만의 취향과 개성이 있는 거다. 누군가를 따라 한다고 해서 되는 건 더더욱 아니다. 어딘지 모르게 섭섭한 마음으로 책방을 나섰다. 각자가 가져야 할 물건과 주어진 길은 따로 있다는 것까지 느꼈다고 하면 큰 비약일까. 어렴풋이 느껴지는 감정을 곱씹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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