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을 부른 순간

2019. 2. 5. 23:59에세이 하루한편


설 연휴를 맞아 할머니를 보러 병원에 갔다. 내가 막 병실에 도착했을 땐 간이침대에 엄마만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6인실 병실에 첫 번째 줄 창가 자리였다. 할머니는 어디 가셨냐고 묻자 혈압이 낮아져서 급하게 치료실로 갔다고 했다. 혈압을 재기 전까지만 해도 별다른 이상이 없어보였으니 큰 문제는 아닐 거라 생각했다. 병실 안은 건조한 공기에 퀴퀴한 냄새가 났다. 창문을 열었다. 엄마와 잠시 대화를 나누다 커피 심부름을 다녀온 사이 상황은 변해있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그 짧은 순간이 할머니에겐 분초를 다툰 시간이었다. 보호자 분, 며느리님! 간호사가 엄마를 불러 담당 의사와 통화하라며 전화를 바꿔주었다. 상태가 많이 안 좋으니 중환자실로 옮겨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엄마는 곧 가족들이 도착하니 조금 이따가 결정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치료실은 병동 데스크 겸 간호사실이라 푯말이 붙어있는 공간 뒤쪽이었다. 침대 하나가 들어갈 작은 공간에 할머니는 눈을 감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산소 호흡기를 막 씌운 상태였다. 온갖 선이 손가락과 손등에, 팔과 배, 그리고 다리에 붙어있었다. 혈압과 맥박, 호흡수를 점검하는 네모난 기계에 산소호흡기, 복수를 빼기 위해 달아놓은 줄, 영양제와 링거 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할머니를 만지기도 조심스러운 상황이었다. 엄마는 할머니를 좀 불러보라고 했다. 난 할머니 귀 가까이 얼굴을 대고 할머니, 할머니! 하고 불렀다. 회색빛 탁한 눈동자로 허공을 바라봤다. 목소리에 반응하는 거였다. 내가 무슨 얘기를 하면 고개도 끄덕끄덕 움직였다. 한시름 놓고 있자 가족들이 도착했다.

의사는 임종을 토요일로 예측한다고 했다. 그전에 친인척들을 초대해 가족들 모두 준비를 하라는 말도 덧붙였단다. 아빠는 심폐소생술 거부 동의서에 사인했다. 마지막, 최악의 상황에 몸에 구멍을 뚫어 관을 삽입하거나 심장 마사지 등을 일컫는 거였다. 그 과정에 환자는 극심한 고통을 느낀다고 했다. 우리 가족은 할머니를 자연스레 보내드리기로 했다. 분위기는 무거웠지만 슬프지 않았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마음의 준비는 항상 하고 있었으니까. 새근새근 잠을 자는 할머니 곁에 오래 있었다. 그 상황을, 분위기를 천천히 살펴봤다. 두 세 시간이 지나자 안정을 찾은 할머니는 몇 마디 말을 하기 시작했다. , 간단한 대답도 하기도 했고 목이 말라, 물 좀 줘, 라는 식의 짧은 문장도 말했다. 가끔 웃기도 했다.

틀니를 뺀 입이 안쪽으로 동그랗게 말려있어 꼭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아기 같기도 하고. 아예 틀니를 빼고 생활한다는 건 더는 씹을 일이 없다는 뜻이었다. 요 며칠 식사로 미음만 드셨고 환자 이유식도 입에 잘 대지 않았다고 했으니 더욱 필요가 없었지만, 그 모습을 오래오래 바라봤다. 웃음이 났다. 우리 할머니 아기 같네. 안정을 찾은 가운데 가족들이 병실을 자주 왔다 갔다 하자 기운이 났는지 할머니는 아주 오랜만에 날 알아봤다. 내 이름을 부르면서 ㅇㅇ도 왔네? 말씀하셨다. 난 너무 기뻐서 손뼉을 쳤다. 할머니, 저온 거 어떻게 아셨어요! 맞아요, 저 왔어요.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겁지 않았다. 내 이름을 불러준 게 선물 같았다. 할머니가 나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

할머니를 잘 보내드릴 힘이 생겼다. 앞으로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무거운 마음의 짐을 덜어놓은 기분이었다. 할머니가 내 이름을 다시 불러줬다는 사실만으로. 그 짧은 순간으로 인해. 

'에세이 하루한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꺼풀과 흰머리 한 가닥  (0) 2019.02.08
나태함과 게으름  (0) 2019.02.07
딱 너만큼의 온기  (0) 2019.02.04
결정을 내려야 할 때  (0) 2019.02.03
그래서 그랬구나  (0) 2019.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