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주어서 고맙다고

2019. 2. 13. 01:17에세이 하루한편

 

할머니가 또 하나의 시술을 했다. 폐에 찬 물을 빼기 위해 관을 삽입해 호스로 연결한 뒤 물을 빼내는 작업이었다. 이번엔 오른쪽 옆구리였다. 오후 2시쯤 시작된 시술은 한 시간도 안 돼서 끝이 났다. 경과가 좋다는 사실을 듣고 간 터라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오후 4시 정도에 도착한 병원은 한결 분주해 보였다. 할머니는 주무시고 계셨다. 다시 틀니를 빼서 쭈글쭈글한 입을 한껏 다물고 있는 모습이 아기 같았다. 가만히 있어도 꼭 웃고 있는 것 같아 나도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할머니 저 왔어요, 말하자 환하게 웃으셨다. 웃으니 입이 네모모양이 됐다. 이가 하나도 나지 않은 아이 같다. 상태가 많이 좋아지셨다며 대화를 거드는 간병인 아주머니가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이따 미음도 좀 잡술 거지, 그치? 할머니는 고개를 도리도리. 목만 내놓고 덮은 이불에 유난히 작은 머리가 좌우로 왔다 갔다 한다. 뭐만 먹자고 하면 무조건 싫다고 하는 할머니. 왜에, 왜 안 먹어. 아주머니가 말하자 우리는 웃음이 터졌다. 투정을 부리는 모습이 보기 좋다.

혈소판이 부족한 할머니는 피 주사도 맞았다고 했다. 피를 수혈하는 거였다. 그래서 그런지 멍도 매우 옅어진 모습이었다. 잘 이겨내고 있었다. 할머니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한 사람이었다. 할머니는 그랬다. 고집스럽고 억센 면이 있었다. 잘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 할머니 말에 의하면 초등학교도 안 간 어린아이들 둘을 데리고 치과에 갔단다. 화곡역에서 천호역까지. 한여름, 지하철 한 시간 거리를 가느라 아주 혼이 났다고 했다. 할머니 이를 발치 한 뒤 솜뭉치를 입안 가득 쑤셔 넣었지만 피는 울컥울컥 솟아 나왔단다. 피가 철철 나는 거야, 이 대목에선 항상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어린아이 두 명의 손을 꼭 잡고, 왔던 길을 되돌아왔다고 했다. 나는 빨간 피를 보고 자지러지게 울었다고 했다. 너 기억 안 나? 이 말도 이 대목에서 꼭 물으셨고. 나는 기억이 안 난다고 대답하면 그때 어찌나 고생했던지얼른 말을 이으셨다. 더운 날, 왜 오빠와 나를 어딘가에 맡기지 않고 굳이 치과에 함께 데려갔는지는 모르겠다. 고집스럽다고, 미련한 모습이지만 할머니는 그랬다.

내가 한 강단 하는 사람이야. 할머니는 가끔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렇게 강한 할머니 덕에 오늘도 이별을 미뤘다. 그래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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