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사실 거짓말이야

2019. 3. 24. 23:58에세이 하루한편

 

눈을 떠보니 열한 시 반이었다. 아침에 전화가 울렸고 아빠가 받았던 것 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푹 잤다. , 오늘 일요일이지. 아무런 기척이 없길래 엄마와 아빠가 교회에 간 줄 알았다. 개수대엔 설거지가 잔뜩 쌓여있었다. 은색 밥솥이 보였다. 밥을 해야 하는데, 귀찮네. 국그릇을 하나 꺼내 시리얼을 부었다. 시리얼을 적실 정도로만 우유를 붓고 수저로 바나나를 잘라 그 위에 얹었다. 내 아침과 점심이다. 최근 외식도 많이 한데다가 밀가루 음식을 많이 먹어서 속을 좀 비울 필요가 있었다. 밥에 김치가 간절했지만 그건 저녁때 먹기로 하자. 시리얼을 후루룩 들이켰다. 휴일엔 시리얼이지. 우유를 너무 많이 먹으면 속이 더부룩하지만 배가 고팠기에 많이 먹었다. 잠에서 깨보니 아무도 없는 집은 오랜만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린 뒤 엄마가 들어왔다. 교회에 간 줄 알았던 엄마는 할머니 댁, 그러니까 할아버지 댁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집을 치우고 왔다고 했다. 들고 온 대야를 화장실에 놓은 뒤 점심을 차렸다. 엄마는 어디서 난지 모를 남은 밥을 한 숟갈 뜨면서 말했다. 할아버지가 펑펑 우셨대. 손수건이 다 젖을 정도로. 손수건을 만져보니까 축축해. 아주 그냥 축축해. 아이고. 나는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이고, 어떡하면 좋아. 엄마는 달력을 보더니 이주 됐지? 이주. 그럼 한창 슬퍼하실 때지. , 벌써 그렇게 됐네. 난 이런저런 생각 하며 엄마가 점심을 먹는 모습을 지켜봤다. 할아버지가 어린 애가 된 것 같아. 아홉 살짜리 애를 자취시킨 기분이야. 할머니를 따라 천국에 가고 싶다고 하셨대. 말문이 막혔다. 그래도 아빠랑 같이 교회에 잘 가셨다니 다행이네. 교회고 뭐고 복지관이고 나발이고 다 싫다고 하는 것보단 낫잖아. 내가 꺼낸 말이었다. 유난히 눈물을 자주 보이시던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전화는 몇 번 더 왔다. 교회에 다녀왔다는 확인 전화로, 뭔가를 물어보려는 이유로 두 번. 모두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나는 방에서 책을 읽고 영화를 봤다. 모처럼 휴식을 취했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를 읽고 <레이디 버드>를 봤다. 다 본 뒤에도 온종일 뭔가를 보고 읽었다. 설거지하고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먹고 인터넷을 하고 머리를 감았다. 시간이 지난다고 다 괜찮아지는 건 아니야.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누군가를 위로할 때 흔히 썼던 말이지만 오늘은 이 말이 안 나왔다. 그러길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말일 뿐이란 걸 깨달았다. 할아버지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까. 할머니는 큰아빠 얘기를 할 때마다 우셨는데. 큰아빠를 낳지 못하게 했던 집 주인 얘기를 할 때마다 서럽게 우셨는데. 60년 전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렇게 애달파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는 말은 거짓말 같아. 이 글을 쓴 게 우스워질 만큼 할아버지가 얼른 기운을 차리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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