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군자는 아닙니다만

2019. 4. 12. 23:55에세이 하루한편



카페에서 만난 H와 서로의 근황을 하나둘 늘어놓았다. 대학원 졸업을 앞둔 H는 논문을 쓰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4월 중으로 졸업 논문을 완성하기 전 학회지에 투고를 목표로 논문 지도를 받고 있는데, 문제는 지도 교수님이 논문을 제대로 봐주지 않는다는 거였다. 엉뚱한 질문을 하고 수업을 제대로 이끌어가지 않으며 쓸데없는 요구를 하는 교수의 행동에 화가 나 보였다. 나는 묵묵히 이야기를 들었다. 그동안 대학원 생활에 잡음이 많았던 H는 요즘 학교에 잘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 주제는 빠르게 바뀌었다. 남자친구, 가족, 부모님, 새로 생긴 취미 등등. 이야기는 즐거움과 불안을 줄타기하며 이어졌다. , 나도 일을 해야 하긴 하는데. 너는 안 불안해? H가 물었다. ? 나도 불안하지. 소속감이 화두가 되자 이번엔 내가 말을 꺼냈다. 어제 버팀목 전세 대출을 알아보러 갔는데 내가 프리랜서라 내 소속을 증명할 수가 없대. 이도 저도 아닌 위치라 서류로 증명하기가 어렵다나. 그때 느꼈지. , 이게 프리랜서의 소속감이란 거구나. 그래도 너 대단하다. H가 말했다. 그런가, 내가 맞받아쳤다.

그동안 느낀 것도 있고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겪은 일 때문도 그렇고많이 내려놓게 됐어. 불안하다가도 다시 금방 안정을 찾는 것 같아. 예전 같았으면 그 생각에 휩싸여서 지냈을 텐데 요즘은 괜찮아. 나이 먹을수록 그런가 봐. H는 할머니의 죽음에 의연한 모습을 보이는 나를, 프리랜서로 일하지만 크게 불안해하지 않는 나를, 혼자서 책을 만들고 뭔가를 계속해나가는 나를 선망하는 듯했다. 며칠 전 다른 친구를 만났을 땐 할머니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보였고 면접 결과가 나오지 않아 다른 일을 알아본 나였는데. H는 예전부터 그랬다. 나도 너처럼 단순하게 살고 싶어. 넌 모든 일을 그럴 수 있지, 하면서 다 인정하고 털어버릴 수 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래. 나도 그러고 싶어. 나도 날것의 감정을 표현할 때가 있다. 평정을 찾는 데 시간을 많이 쓸 뿐이지, 와르르 무너질 때도 있다.

마치 내가 성인군자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모든 걸 이해해주고, 다 그럴 수 있다고 말해야 하는 성인이 된 기분. H는 항상 나의 좋은 면을 봐주었고 아낌없이 칭찬했다. 가끔은 부러워하기도 했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던 중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느낌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찾았다. 그건 나에 대한 기대감을 계속 충족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이었다. 네가 그렇게 말할 줄 몰랐어. 누군가를 실망하게 하지 않아야 한다는 긴장과 나는 점점 더 단단해져야만 한다는 강박.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며 속으로 되뇌었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내가 뭐 성인군자, 부처랑 예수도 아니고 어떻게 맨날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가 있어. 나도 노력하는 건데. 말도 안 되는 압박감은 내려놓기로 한다. 나도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사는 거다. 그러면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고 싶은 것들을 찾아서 하는 것뿐이다. 뭐가 됐든. 꾸준히.

그렇게 대단하지도, 그렇다고 한심하지 않은 인생이니 과한 칭찬은 필요 없다. 나를 더 불편하게 할 뿐이다. 칭찬받고 싶어서 억지로 그런 척하고 싶지 않다. 성인군자도 아니고 될 생각도 없으니 말이다.   


나도 어두움과 밝음이 있는 평범한 사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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