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쓰는 게 꼭 나 같아서

2019. 4. 14. 23:58에세이 하루한편

카페에서 글을 쓴다. 여행기를 써야 하는데 어제도 그제도 글이 안 써진다는 이유로 미루던 걸 시작하기 위해서다. 억지로라도 시작하려고. 그래, 사진을 다시 보면서 그때 감정을 되살려보자. 사진 배치와 글 구성을 어떻게 할 건지 수첩에 적고 있을 때 중국어가 들렸다. ‘나는 빨간색을 좋아해요를 어떻게 말하죠? 여자 목소리였다. 내 맞은편 여자가 앞에 학생을 앉혀놓고 중국어 과외를 하는 중이었다. 목소리가 귀에 쏙쏙 박히는 하이톤에 발음까지 정확했다. 큰 목소리에 주변 사람들이 흘끔흘끔 쳐다보는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안경을 쓴 여자는 학생의 비위를 맞추며 적절한 농담과 개인사를 섞어가며 수업을 이끌었다. 학생도 성인인지 수업은 ㅇㅇ, 라고 불렀고 존댓말로 설명했다. 딱 부러지는 곧은 목소리가 거슬렸다. 조금만 조용히 해달라고 할까. 고민하다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수업을 시작할 때는 커졌던 목소리가 농담을 할 때는 작아지기를 반복했기 때문에 뭐라 말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집중이 안 됐다. 화려한 중국어 성조를 듣고 있자니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 같았다. 시옷 발음도 어찌나 센지 쓰, 라는 발음만 하면 음악을 뚫고 내 귀에 들어올 정도였다. 오늘 여기서 글쓰기란 글렀군. 여자와 최대한 먼 자리가 나길 기다리며 시작하는 글을 썼다 지웠다 하는 사이 두 번째 학생이 왔다. 여자는 다영씨, 하며 학생을 반겼다. 중국어 탓 인 걸까 를 꼭 로 발음했다. 삼십분이 지나자 두 번째 학생은 의욕이 많이 떨어졌는지 여자가 자꾸만 말을 붙였다. 다른 거 뭐 먹을래요? 와 나 오늘 이렇게 보니까 공부 진짜 잘 해 보인다, 그죠? 학생의 대답은 안 들렸지만 여자의 질문은 또렷이 들렸다. 관심을 이끌어내려 무진장 애를 쓰는 중이었다. , 이번엔 동사의 부정 표현 들어갈게요. 그러다가도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설명을 했다. 목소리가 카페를 울렸지만 학생은 잘 따라와 주지 않는지 곧이어 다영씌, 왜 필기 안 해요, 라는 말이 들려왔다. 집중력이 완전 떨어 졌네요, 다영씌. 다영씌 미워. 여자가 말했다. 그러더니 둘은 간식거리를 주문하러 1층에 내려갔다. 미워미워미워미워미워. 애정 어린 농담을 하는 듯 여자는 밉다는 말을 반복했다. 몇 번을 말하는지 모를 정도였다.

여자는 뭔가를 강조할 때 같은 단어를 반복해서 말했다. 빨리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쌩, 하고 지나가게 말이다. 여자의 특이한 화법을 피하고 싶어도 계속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애쓴다. 애써. 내가 학원에서 학생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던 게 얼핏 생각났다. 말이 많지 않은 내가 뭐라도 해야겠으니 억지로 웃고 칭찬을 하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반응해주던 게. 저 사람도 똑같겠지. 기억에서 빠져나와보니 어느새 목소리는 멀어지고 있었다. 학생과 함께 2층 계단을 내려가는 중이었다. 여자가 사라지자 카페는 조용했다. 음악소리가 이렇게 컸었나. 일본 힙합 음악이 매장을 메웠다. 이 음악은 누구 취향인 거지. 그나저나 글은 어떡하지. 내일 도서관에 가서 써야겠다. 아등바등 써지지 않는 글을 붙잡고 머리를 쥐어뜯는 나도 참 애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르바이트를 알아보려 알바몬과 잡코리아 사이트에 들어갔다. 수없이 많은 채용공고를 스크롤로 죽 내렸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 회사와 직무가 스쳐 지나갔다. 앞으로도 애써야 할 내 인생도 잠시 상상했다. , 애쓰기 싫은데. 아등바등 살고 싶지도 않은데. 누군가의 눈에는 내가 그 여자처럼 보이겠지. 여자가 내려간 계단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처럼. 계단을 내려와 1층에서 카페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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