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로를 (제대로) 이탈했습니다

2019. 4. 19. 23:37에세이 하루한편


며칠 전 잠이 안 오던 새벽이었다. 그 날밤 여덟 시가 넘어서 마신 녹차 때문인지 바뀐 잠자리 탓인지 잠이 올 것 같다가도 눈이 떠졌다. 열두 시 반에 누워 새벽 두 시까지 뒤척이다 이불 속에서 기어 나왔다. , 불을 켜자 눈이 부셔와 찡그린 채로 잠시 있었다. 책장에서 읽던 책을 꺼냈다. 단편 소설 두 편을 읽으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그래도 잠이 오지 않았다. 노트북을 켜 유튜브 사이트에 접속했다. 유튜브 감상은 요즘 내 취미 중 하나다. 이것저것 보다가 청춘 페스티벌에 대한 영상을 클릭했다. 강연은 넓은 운동장에서 시작했다. 무대 위 잔디밭에는 20대로 보이는 사람들이 햇빛에 얼굴을 가리고 앉아있었다. 오백 명쯤 되려나. 강연자는 노홍철이다. 자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한다.

남자가 손을 번쩍 든다. 뭘 해야 할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는 고민이다. 하고 싶은 거 다 해보세요. 20대 초반, 그 나이 때는 정말 하고 싶은 거 다 해봐야 한다며 자신의 예를 들어준다. 좋아하는 걸 하다 보니 이 자리까지 오게 됐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다 보니 돈까지 많이 벌게 됐다는 말이었다. 끝으로 앳돼 보이는 남자에게 오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꺼내 용돈을 쥐여준다. 맛있는 걸 먹으며 진지하게 생각해보라는 거다. 내가 뭘 잘하는 것 같아, 친구에게도 물어보라면서. 그러면서 덧붙인다. 이렇게 살아도 나쁘지 않다는 거지, 돈을 많이 벌어서 행복하다는 게 아니에요. , 이런 강연은 처음이었다. 말 그대로 뻔한 강연이 아니어서 충격이었다. 내친김에 그의 다른 영상을 더 찾아봤다.

예상치 못한 일에 부닥친 청춘들에게라는 영상이었다. 왼쪽 상단엔 조그맣게 청춘, 길을 잃어도 괜찮을까?’라는 질문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비게이션도 경로를 이탈하잖아요. 저한테는 도움 안 되는 경로 이탈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아요. (중략) 산으로 가는 경험은 아무리 조심해도 그걸 안 할 순 없는 것 같고 감히 말하자면 저는 아주 꼭 필요한 인생의 필수 항목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요.” 길을 잃는 건 꼭 필요한 항목이며 아무리 길을 잃지 않으려 발버둥 쳐도 그럴 순 없다는 말이 좋았다. 멀리서 보면 다 이러려고 날 거쳐 간 일이구나, 느낄 수 있을 테니까. 그래, 기계인 내비게이션도 경로를 이탈하는데. 사람인 나는 얼마나 자주 그러겠어. 나도 재탐색하면 되지. 이게 당연한 거야.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이 뜨거워졌다. 자동으로 뜨는 연관 영상을 보다가 시계를 봤다. 새벽 다섯 시였다.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면서 생각했다. 고민했던 카메라를 사야겠어. 소설 강의도 듣고, 내일 배움 카드로 영상 수업도 들어야겠어. 그래, 조금이라도 해보고 싶었던 건 다 해보는 거야. 가슴에 화르르 불꽃이 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 그리고 삼일 뒤인 오늘. 나는 6개월 할부로 카메라를 샀고 내일부터 영상 수업을 들으러 간다. 경로를 제대로 이탈해보겠다는 말씀. 어디 한번 해보자고. 어째 사흘 전 밤에 잠이 안 온건 내 결정에 확인 도장을 꾹 찍게 만들기 위해 서 인 것 같다. 잠이 잘 왔다면 동영상을 보지도 않았을 텐데. 그리하여 새로운 일 도전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재탐색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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