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정전이 필요해

2019. 4. 23. 23:59에세이 하루한편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전 세대에 전기가 공급되지 않는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띠디디딩. 알람이 울리며 시작되는 안내방송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전했다. 전기가 안 나오니 컴퓨터 사용해 주의하라는 내용도 있었다. 이틀 전부터 나오던 공지는 오늘 아침을 끝으로 105분경 부터 전기가 툭, 끊겼다. 다행히 엘리베이터는 사용할 수 있었다. 집안은 불을 켜지 못하니 흐린 하늘처럼 어두웠다. 화장실을 가거나 내 방에 들어갈 때면 습관적으로 스위치를 딸깍하고 누르게 됐다. 아 맞다. 불 안 들어오지. 의식하는 것도 잠시였다. 불이 안 들어오니 뭘 해야 할까. 갑자기 할 게 없어졌다. 노트북을 켜 여행기를 쓸까. 아니면 창가로 들어오는 빛을 형광등 삼아 책을 읽을까. 후자를 택했다. 30분 정도 지나자 눈이 피로해져 책을 덮었다.

점심을 먹곤 카페에 가서 글을 쓸 예정이니 점심시간 전만 버티면 된다. 할 게 없어서 엄마에게 괜히 말을 붙이고 엄마 옆을 얼쩡거렸다. 데이터 무제한도 아니니 와이파이가 없으면 핸드폰을 안 하게 됐다. 얼마 전 데이터를 모두 소진했다는 문자도 받은 참이었다. 전자기기는 쓸 수 없으니 뭘 하지. 그림을 그렸다. 최근 엄마가 듣고 있는 실버 미술이라는 수업에서 나무, , 사람을 그려오라는 숙제가 있다기에 그린 거다. 내 심리도 한 번 파악해달라는 의미로. 수업은 수요일이니 그전에 그려야지, 그려야지 하다가 오늘 그렸다. 힘든 것도 아니고 어려운 것도 아닌 단지 귀찮아서 미루던 거였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거니까. 그림을 다 그리며 생각했다. 어라, 이거 디지털 다이어트잖아? 정전이 이런 효과가 있다니. 안 하던 걸 하게 되네.

점심을 먹고 어두컴컴한 집에서 나가 카페에 갔다. 여행기를 썼다. 와이파이가 터지고 불이 들어오는 곳에 있으니 이렇게 좋구나. 주문한 녹차 라테를 홀짝이며 신나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왠지 오늘따라 술술 잘 풀리는 것 같은데? 단시간의 정전이 불러온 효과인지 모르겠지만 인터넷 세상에 접속했다는 것만으로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그렇게 글을 마무리한 뒤 산책을 하다가 집에 들어갔다. 불도 제대로 들어오고 냉장고는 시원했으며 밥솥 안은 따뜻했다. 전기가 들어오는구나. 짧은 여정이 끝났음을 실감했다. 그리곤 습관처럼 노트북에서 TV 다시 보기 사이트에 접속했다. 영상을 보며 저녁을 먹었다. 블로그에 올릴 글을 미리 써두자고 다짐했지만 피곤하다는 이유로 미뤄버렸다. 그리곤 유튜브에 들어가 이런저런 영상을 봤다.

나의 습관을 살펴봤다. 쉬는 의미로 보기 시작한 영상들은 사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서 하는 행동에 가까웠다. 정말 쉬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데. 문득 오전의 정전이 생각났다. 쉴 땐 제대로 쉬고, 뭔가를 할 땐 그것만 할 수 있었는데. ‘진짜로 생각한다는 느낌’도 들었다. 생각하는 척이 아니라 진짜 머리를 굴려 생각하는 시간이랄까. 그림을 그리며 타샤 튜더를 떠올렸다. 정원이 넓은 집에서 여유롭게 따뜻한 차를 마시는 내 모습과 고양이 한 마리를 그렸다. 내가 원하는 미래의 내 모습이니까. 그렇게 상상하다 보니 그녀가 나오는 영화를 봤을 때의 느낌도 떠올랐다. 짧지만 다양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고 불편한 시간이었지만 나에게 필요한 순간이었다. 앞으로도 머리와 마음속 정전을 가져야겠다. 어지러운 인터넷 세상에서 벗어나 생각을 멈추고 빠져나올 시간. 채우는 것이 아닌 비우는 시간을.


검정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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