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2019. 5. 27. 23:53에세이 하루한편

뱀이 된 아버지


박연준



아버지를 병원에 걸어놓고 나왔다

얼굴이 간지럽다


아버지는 빨간 핏방울을 입술에 묻히고

바닥에 스민 듯 잠을 자다

개처럼 질질 끌려 이송되었다

반항도 안 하고

아버지는 나를 잠깐 보더니

처제, 하고 불렀다

아버지는 연지를 바르고 시집가는 계집애처럼 곱고

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아버지의 팥죽색 얼굴 위에서 하염없이 서성이다

미소처럼, 아주 조금 찡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지나가는 뱀을 구경했다


기운이 없고 촉촉한 - 하품을 하는 저 뱀

 

나는 원래 느리단다

나처럼 길고, 아름답고, 축축한 건

원래가 느린 법이란다

그러니 얘야,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어둠이 고개를 다 넘어갈 때까지

눈을 감으렴

잠시,

눈을 감고 기도해주렴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중




'에세이 하루한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집 구하기①_잃어버림  (0) 2019.05.29
이제 한 걸음을 떼어서  (0) 2019.05.28
2초의 시간  (0) 2019.05.26
여름이 온다  (0) 2019.05.25
1부터 10의 세계  (2) 2019.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