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한 걸음을 떼어서

2019. 5. 28. 23:36에세이 하루한편

나는 체념한 상태다. 가족들과 다른 생활패턴과 층간소음에 지칠 대로 지친 다음 단계였다. 사흘에 한 번 새벽에 퇴근하는 아빠와 새벽 5시 반이면 일어나는 엄마, 6시 반이면 시끄러운 윗집, 이 모든 것에. 잠귀가 밝아 작은 소리에도 깨는 나는 아빠가 퇴근하고 씻는 소리에, 벽을 타고 울리는 소변보는 소리나 물 내리는 화장실 소리에, 컹컹하고 짖는 강아지 소리에 괴로웠다. 그 외의 다양한 소음이 날 괴롭혔다. 셀 수 없이 많았다. 무엇보다 잠을 자지 못하는 게 힘들었다. 몇 시에 자든 새벽에 한 번씩 깨는 건 기본이요, 아빠가 잠든 새벽 3시가 넘어서 수면유도제를 먹고 간신히 자곤 했으니까. 그마저도 다른 소음으로 얼마 가지 못했다. 며칠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건지도 모를 정도였다. 새벽에 꼭 한 번씩 깨다가 선잠을 자기 일쑤였다. 몸이 피곤함을 이기지 못했는지 어제는 코피가 났다.

잠자리를 바꿔 거실에서도 자봤지만 깨는 건 여전했다. 난 왜 이렇게 예민한 걸까. 괴로웠다. 요 며칠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시간이 줄었다가 늘어나는 것처럼 하루가 길다가도 짧았다. 제정신이 아니다. 불면증이 괴로운 걸 누구보다 절실히 깨달았다. 몸은 피곤해 미칠 것 같지만 밤에 또 잠을 자지 못할까 봐 낮잠도 자지 않고 버티고, 머리가 멍해서 하루를 그냥 흘려보낸 적도 있었다. 열 가지 중에 좋은 게 하나라도 있으면 그걸 계속 떠올려보라는 말을 어디선가 주워들어서 마음을 다스리는 중이었다. 체념과 함께. 그래, 내 상황에서도 좋은 점 하나는 있을 거야. 그랬더니 내 상황에서도 좋은 점이 보이기 시작했고, 신기하게도 그즈음 가족들이 내 독립의 필요성을 조금씩 이해해줬다. 불평만 하고 안 좋은 점만 꼽던 시절과는 다르게, 힘들지만 감사한 걸 찾아내자 상황은 변했다. 현재는 내가 곧 집을 떠날 것을 가족들도 조금씩 실감하는 중이다.

막상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내가 사는 지금 이곳이 다르게 보였다. 매일 가던 산책로나 자주 가던 카페, 지겹게 탔던 마을버스, 수백 권을 빌렸던 도서관을 생각하니 그랬다. 너무 익숙해져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오늘도 그랬다. 글을 쓰러 카페를 가기 위해 걸었던 산책로가 너무나 아름다웠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나뭇잎과 눈이 부신 하늘. 마음이 일렁였고 복잡했다. 과거의 일을 회상하며 술기운에 눈물을 보였던 아빠나, 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 장난스럽게 흘리듯이 말하는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그냥 이대로 살아볼까. 조금만 더 불편함을 참아볼까. 감사한 것만 생각하며 살아볼까. 살던 대로 살면 편하겠지.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럴 순 없었다. 그동안 꿈꿔왔던 내 공간을 찾아야 했다. 익숙한 것으로부터 한 걸음 떠나 기꺼이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그러자 난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새로운 곳을 찾아갈 것을. 그리고 변화할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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