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초의 시간

2019. 5. 26. 23:16에세이 하루한편

 


아직 정리하지 않은 옷장 하나가 남아있었다. 예전엔 할아버지의 침실이었지만 지금은 창고 겸 옷 방으로 쓰고 있는 작은 방이었다. 그곳 붙박이장에는 정리를 기다리는 옷가지들이 보따리에, 상자에, 플라스틱 통에 담겨있었다. 엄마와 나는 붙박이장 손잡이를 열고 수없이 많은 세월을 그 자리에 있었을 할머니의 물건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정리하고 정리해도 도저히 다 버려지지 않는 짐들을 바닥에 던졌다. 먼지가 폴폴 일었다. 쓸 만한 가방, 한복, 내복, 반소매와 긴소매, 코트와 모자가 색색깔 보자기에 싸여있었다. 한 번도 들지 않은 것 같은 가방을 보며, 고급스러워 보이는 리본과 큐빅이 박힌 검은색 모자를 보며 할머니는 생전에 왜 이것들을 들거나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좋은 게 많은 데 왜 사용하지 않고. 아끼기만 하셔서. 한숨 섞인 혼잣말이 나왔다. 더러워진 면 마스크나 두꺼운 천으로 만든 포장지, 천 쪼가리들을 모아둔 보자기를 풀었다. 한복짐과 쓸 만한 것들을 빼고는 모두 종량제 봉투에 넣었다.

엄마, 원래 사람이 팔십을 넘게 살면 짐이 이렇게 많은 걸까. 그러게 말이야. 엄마는 다 정리하고 갈 거야. 엄마가 말했다. 나는 아예 짐을 늘리지 않을 거야. 내가 말했다. 짐이 너무 많은 말을 하니까 안 되겠어. 남겨진 사람한테 너무 많은 말을 거는 것 같아. 난 속으로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오는 기척이 들렸다. 정리는 끝나가고 있었다. 교회에 다녀왔다며, 쉬엄쉬엄 오는 길이라고 말했다. 씻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할아버지는 너 오늘 쉬는 날이냐? 나에게 시간 좀 있느냐고 물으셨다. . 어디 내 블로그 한 번 들어가 봐. , 사진 때문에요? 할아버지가 찾는 사진이 블로그에 있대. 어떻게 들어가는 거니. 언젠가 엄마가 나에게 물었던 게 어렴풋이 떠올랐다. 나는 옷 정리로 지친 상태여서 빨리 집에 가고 싶었지만 친절하게 대답했다. 그럼 할아버지 이리로 와보세요. 컴퓨터를 켰다. 할아버지는 다음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천천히 꾹꾹 눌렀다. 여기 블로그 있잖아요, 여기에서 내 블로그로 가면 보여요.

어디 이거 봐봐. 노인행복대학 졸업식 사진이라고 했다. 모니터 속 10년 전의 할머니 할아버지 가운과 학사모를 쓰고 웃고 있었다. 2초가량의 동영상이었다. 게시 글의 날짜를 보니 2009, 10년 전이었다. 할아버지는 그 동영상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고 했다. 화질이 안 좋아 할머니와 할아버지 얼굴이 마구 깨져있었다. 동영상을 몇 번 재생하자 인터넷이 버벅거려 새로 고침 버튼을 누를 때마다 지금은 좀 낫네, 라고 할아버지는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똑같은데. 동영상을 사진으로 남기는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시작 메뉴에서 캡처 도구를 불러와 화면을 캡처했다. 바탕화면에 할머니 할아버지 졸업사진이라고 저장했다. 한 장의 사진으로 남은 그 시절을 가만히 상상할 찰나 갈라진 할아버지가 말했다. 이렇게 보니까 아직도 꼭 살아있는 것 같어. 2초의 동영상 속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고 할머니는 앞으로 한 걸음을 뗐다.

너무 짧아서 재생 버튼인 스페이스 바를 자꾸만 눌러야 했다. 딸깍, 딸깍. 할머니는 동영상 속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뒤로 물러서기를 반복했다. 난 아무런 말 없이 화면을 들여다봤다. 침묵 속에서 10년 세월이 동영상 속 2초처럼 너무 빨리, 지나간 것 같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침대 머리맡에 두셨던 파란 가방과 지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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