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 달 살기 17. 오름을 오르고 내린 것뿐인데

2018. 9. 5. 23:58여행을 기록하자/제주도 한달살기

[17]
다랑쉬 오름

다랑쉬 오름을 두 번째로 찾았다. 처음 찾았던 날엔 부슬비가 내려 안개가 자욱하게 가라앉아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았다. 바람도 불어서 오름에 오르다 아쉬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갔다. 맑은 날에 다시 가리라 다짐해서 찾은 게 오늘이었다. 환한 빛이 내리쬐는 날씨에 다시 보니 이렇게 높았나 새삼 놀랐다. 그땐 안개가 다랑쉬 오름 윗부분뿐만 아니라 아끈 다랑쉬 오름의 정체도 감춰버렸는데 오늘은 선명하게 보였다. 다시 만나니 반가웠다. 반갑다, 오름아.

제주 설화에 의하면 설문대할망이 치마로 흙을 나르면서 한 줌씩 놓은 것이 제주의 오름인데, 다랑쉬오름의 경우에는 흙을 놓자 너무 두드러져서 손으로 '탁' 쳐서 패이게 한 것이 지금의 분화구가 된 것이라고 한다. 근데 설문대할망이 흙을 아주 많이, 나른 것 같다. 여태까지 올랐던 오름 중에서 오르는 게 가장 힘들었다. 몇 번을 쉬었다 올라간 정상은 나에게 수고했다며 저 멀리 지미봉과 우도, 성산 일출봉을 보여줬다. 귀여운 아끈 다랑쉬 오름도. 아끈이란 제주 말로 ‘작은’이란 뜻인데 다랑쉬의 분화구 모양을 쏙 빼닮은 걸 볼 수 있다. 아마 설문대할망의 배꼽 크기 정도이지 않을까? 배꼽 모양처럼 분화구가 쏙 들어간 것이 다랑쉬 오름 모양과 똑같아서 더 귀엽다. ​​





바람이 불고 한 바퀴를 빙 돌아보니 절로 와아-하는 탄성이 나왔다. 오름에 오르면 마을도, 나무도, 사람도 모두 작아 보인다. 하늘은 가깝고 이 세상에 나 혼자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여기까진 당연하다. 높은 곳에 오르니 모든 것이 작아 보이는 거니까. 근데 이상한 건 이거다. 바람을 흠뻑 맞고 나면, 가슴이 뻥 뚫리고 다리에 힘이 생긴다.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으니 고된 오르막길보다 훨씬 수월할 거란 걸 예감해서일까.



나는 그냥 오름을 오르고 내려온 것뿐인데 뭐든지 잘해 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미묘한 자신감을 얻고 오는 것이다. 오르기 전과 후, ​나는 아주 미세하게 달라진다. 내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조금. 이상한 일이다. 고작 한 시간이 흘렀을 뿐이고 오름의 여왕인 다랑쉬 오름이 내게 마법을 건 것도, 설문대할망을 직접 만나고 온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당분간은 뭐가 됐든 잘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가득 안고 살아야겠다. 자신감이 또 떨어지면 다시 찾아가면 되니까. 어떻게 된 거냐 물어야지. 아마 그땐, 또 다른 말을 걸어 줄 거다. 난 그렇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