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 달 살기 25. 그럭저럭 괜찮은 생활

2018. 9. 13. 22:29여행을 기록하자/제주도 한달살기

[25]

호우주의보로 제주 서귀포시에는 최고 300mm 비가 왔다. 김녕에는 일간 강수 139mm가 내렸다. 오전 8시에 일어나 세차게 오는 비가 멈출 기세 없이 내려 마라도 가는 배 예약을 취소했다. 예약을 취소하고 아침을 먹고 또 잤다. 어젯밤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빗소리 때문인지 잠이 잘 왔다. 비는 꾸준히 내렸다. 화장실에 물을 틀어 놓은 것처럼 빗소리가 들리고 화장실 천장에선 빗물이 떨어졌다. 화장실에 갈 때마다 머리와 등 언저리에 빗물을 맞아 차가웠다.
하필 오늘 보일러가 고장 나 점심 이후부터 온수를 사용하지 못했다. 간단한 문제인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사장님이 내일 보일러 AS 신청을 해주겠다고 했다. 가스는 사용할 수 있어서 전기 포트와 냄비에 물을 끓여 찬물과 섞어서 씻었다. 제대로 시골살이를 경험하는 것 같다. 딴 얘기지만 화장실에선 민달팽이도 봤다. 며칠간 10~11시 사이에 일정하게 오는 게 신기했다. 먼 길 왔다 다시 떠났다. 지붕과 벽 틈 사이로 사라지는 걸 보니 집이 지붕 속 어딘가에 있는 것 같았다. 핑핑이라 이름을 붙여주고 버섯도 주었더니 맛있게 먹었다. 이런 경험은 시골에서만 할 수 있는 거라 재밌었다. 이제 핑핑이는 안 온다. 대신 순무가 온다.

불편함을 감수할 만큼 시골 생활이 그럭저럭 괜찮다. 근처에 편의점이 없어 마트에 가야 하고, 7시 반만 돼도 가로등 불빛이 어두워 혼자 나가기가 힘들다. 각종 벌레가 나와 뜨악하며 놀랄 때도 있고, 바닷가 근처 집이라 습해 빨래가 잘 마르지 않는다. 그래도 순무와 고양이들 밥을 챙겨줄 수 있고 문만 열고 나가면 바람 타고 오는 파도 소리를 들을 수 있어 좋다. 햇빛 따스운 날에는 평상에 누워 쉴 수도 있고 낙조를 보며 저녁을 먹을 수 있다. 아주 가끔 혼자 같단 생각이 들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괜찮다. 그럭저럭, 다 괜찮다.

아직도 비가 온다. 내일 밤까지는 계속 내릴 예정이란다. 오후 열 시, 마을에선 어제 들었던 것과 같은 호우 주의보를 조심하라는 내용의 방송을 한다. 오늘도 일찍 자야겠다. 생각해보니 산책 삼아 바다 근처를 걷고 마트에 들러 장을 본 게 오늘 외출의 전부였다. 집으로 오는 길, 매일 지나는 길목의 어떤 집의 개가 이제 나를 보고도 짓지 않았다. 내 모습이 익숙해져서일까. 그 사실이 좋아 살짝 웃었다.


난 그럭저럭 괜찮은 생활을 하는 중이다. 계속하고 싶다. 한 달이 괜찮다면 일 년도 괜찮은 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