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 달 살기 24. 떠날 때가 되니 익숙해지네

2018. 9. 12. 22:14여행을 기록하자/제주도 한달살기

[24]

아부오름-토끼섬

어젯밤에 구름이 잔뜩 껴있더니 온종일 흐렸다. 마당에 빨래를 널고 외출을 했다. 강수확률은 50%라 했다. 먹구름이 꼈지만 비는 안 올 것 같았다. 아부오름에 도착할 때 즈음 빗방울이 떨어져 ‘아 맞다, 빨래!’하고 후회했다. 아직 제주 날씨를 예측하기 어려운 육지인이다.

아부오름은 특이하게 오목하게 파인 원형 분화구 안 중심부에 또 둥그렇게 나무가 자라있다. 원 안의 원이다. 분화구는 제주어로 굼부리라 하는데, 이 굼부리가 제일 신비한 곳이 아부오름이었다. 보통 오름 정상에서 굼부리를 바라보면 움푹 파인 모양이 대부분이라 다 똑같이 생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부오름의 굼부리 안에는 소나무처럼 보이는 나무들이 빽빽했다. 신기하게 원형으로 자라 마치 나무들끼리 정모라도 하는 것 같았다. 밤이 되면 저 안에는 신비의 동물이 모습을 드러내는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 걸었다. 유니콘이나 노루, 큰 새, 또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동물들 말이다. 흐리고 안개 낀 날이라 그런지 더 신비롭게 보였다. 맑은 날이 아니어도 괜찮은 날이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 좋았던, 날이었다.



토끼섬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문주란이라는 꽃이 피는 곳이다. 무인도로 하도리 바다에서 50m 떨어진 곳에 있다. 썰물 때는 걸어서 갈 수도 있다고 하니 오늘이 그 날이길 바랐지만, 아니었다. 문주란을 보는 건 기대도 안 했으니 토끼섬 근처에라도 가고 싶었는데. 토끼섬 주차장이라고 치고 도착한 곳엔 ‘토끼썸’ 이라는 카페가 있었다. 잘못 왔나 싶었다. 내려서 둘러보니 사진으로만 봤던 토끼섬이 뭔지도 잘 모르겠고. 저 멀리 보이는 두 개의 봉긋한 것 중 하나일 텐데. 카페에 들어가 물어봤다.
“토끼섬이 어디에요?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저긴데요, 날씨가 좋으면 걸어 들어갈 수도 있는데 오늘은 날씨가 안 좋아서 아마 못 들어 갈 거예요. ”
남자는 창 너머 손가락으로 내가 헷갈렸던 위치를 가리켰다. 어째 여행 하면서 매번 같은 패턴의 대화를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언저리라도 가보려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옆으로 누워있는 모양이 토끼같아서 토끼섬이란 이름이 붙여졌다는데 토끼는 무슨 악어 같았다. 울퉁불퉁한 악어. 악어라도 좋으니 섬에 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간조는 5시 반 즈음이었다. 4시 반이 살짝 넘은 시간이었지만 걸어갔다. 바위들 안에서 게들과 벌레들이 움직이고 작은 돌들이 쭉 깔린 바닥 위를 뚜벅뚜벅 걸었다. 이곳이 몇 시간 후면 바다에 다 잠길 곳이라니. 아직도 너무 신기하다. 밀물과 썰물이 달의 인력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라는 것도. ​


큰 바위를 앞에 두고 더 걷지 못했다. 토끼섬 앞에 바닷물이 넘실댔다. 한창 더운 여름이었다면 걸어가 볼 엄두라도 냈겠지만, 오늘은 바람이 불어 추웠다. 갈아입을 옷도 없었고. 다시 차로 돌아왔다. 아쉬움에 토끼섬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다 여름에 헤엄쳐 섬에 갔다는 사람의 글을 봤다. 바위에서 일직선으로 가는 길은 물이 깊어 왼쪽으로 돌아서 가야 한다는 댓글도 봤다. 무인도라고 하기엔 너무 작지만 그래도 아무도 찾지 않는 섬에 갔다 왔다는 그 글은 감동적이었다. 왠지 모르게. 글을 읽으며 나도 언젠간 꼭 가보리라 다짐했다. 아마 내년 여름을 기약해야겠지만.

물이 빠지는 시간을 기다리려다 차 안에서 깜빡 잠이 들었고 눈을 떠보니 비가 오는 중이었다. 흐린 날씨 탓에 어둑해진 하늘을 보고 ‘이제 슬슬 집에 가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트에 들러 순무 사료를 사고 식빵을 사니 6시가 넘었다. 집 생각이 간절했다. 밥 먹고 일찍 자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제주 시골살이에 좀 익숙해지고 있는 걸까. 집 근처에 가니 순무를 만났다. 얼쩡거리던 중에 나를 만나 아예 같이 집에 들어왔다. 야, 여기 너희 집이냐, 하고 물었지만, 순무는 뻔뻔하다. 아, 뭐든지 떠날 때가 되니 익숙해지는 것 같다.

내일은 마라도에 갈 예정이라 일찍 잠자리에 들 참이었는데 스피커에서 이장으로 추측되는 사람의 목소리가 나왔다. 지붕 위에 스피커가 있었나? 내용인즉슨 지금 제주에 호우 주의보가 내려졌으니 주의하라는 것이었다. 내일은 꼼짝없이 집에 있어야 할 수도 있겠군. 내일은 내일 생각하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