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 달 살기 26. 좀 멀어서요

2018. 9. 14. 23:58여행을 기록하자/제주도 한달살기

[26]
궷물오름-족은 노꼬메-카페동경앤책방

1. 좀 멀어서요

벨롱장에서 산 천 가방을 매고 다닌 지 삼일 정도 됐을까 바닥이 뜯어졌다. 며칠 전의 일이었다. 무겁게 들고 다닌 것도 뾰족한 걸 넣은 것도 아니었다. 다행히 가방 안주머니에 만든이의 상호와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새 상품으로 교환할 수 있는지 물었다. 전화 받은 남자는 단번에 죄송하다고 바꿔주겠다 말했다. 실례지만 내게 어디 사는지 물어 김녕이라 했더니 벨롱장과 멘도롱 장에 올 수 있는지 물었다. 미리 잡아둔 일정이 있어 불확실해 잘 모르겠다 대답했다.

“아… 김녕이면 좀 멀어서요, 그럼 그냥 택배로 보내드릴게요.”
“네? 제주에 안 계신 건가요?”
“아뇨, 저희 가게가 서귀포시 월평로 쪽이라서요.”

예전에 제주 택시 관광 여행을 할 때 택시 기사 아저씨가 한 말이 기억났다. 제주 사람들은 한 시간만 걸리는 거리도 멀게 느낀다고. 그때는 그 말이 이해가 안 갔다. 시간을 조금만 투자하면 갈 수 있는 거리를 왜 멀다고 생각할까. 근데 이제야 알겠다. 제주 동쪽인 김녕에서 서귀포 서쪽인 애월로 가는 한 시간이 너무 멀고 힘들다는 것을. 한 달 동안 오늘을 포함해서 두 번째 간 건데도 여정이 너무 길게만 느껴졌다. 그러니 한 시간 사십 분이 걸리는 가방 가게는 사장님은 오죽했을까.

그 어디보다 먼 곳이 있다. 제주에서 서울. 비행기로 오십 분, 약 한 시간이 채 안 되는 그곳으로 난 다시 돌아갈 예정이다. 같은 한 시간이지만 거리는 훨씬 먼 서울, 집으로. 약 450km 거리를 하늘로 날아갈 예정이다. 아, 벌써 아득하게 멀게 느껴진다. 이곳에 더 머물고 싶은 이유를 ‘서울은 좀 멀어서.’라고 말하면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지금 나에겐 서울이라는 도시가 너무 멀게 느껴진다. 이곳의 생활과는 다르게 살아갈 내 미래가 아득하다. 다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2. 다시 한번, 왔던 만큼 돌아가야 한다는 것

날이 맑아 해가 쨍쨍하길래 애월까지 간 것인데 어쩐지 여기는 빗방울이 아직 떨어지고 안개와 구름이 깔렸다. 궷물오름은 아름다웠다. 그래서 중간중간 해를 보여주는 숲속은 더 신비로웠다. 정상에는 억새가 피기 시작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와 나뭇가지와 잎, 커다란 바위, 앞에 보이는 이름 모를 오름들까지 모두 아름다웠다. 안개에 가렸다 바람 따라 움직이며 슬쩍 봉우리를 보여주는 풍경을 바라봤다. 언제 봐도 좋을 경치였다.


궷물오름에 갔다 족은노꼬메오름에도 올랐다. 아, 족은노꼬메오름은 작지 않았다. 작다고 생각해 오른 것인데 너무 힘들었다. 작은게 이 정도면 큰노꼬메는 얼마나 힘들지 상상이 안 갔다. 경사가 가팔라서 숨이 찼다. 군데군데 진흙이 있어 손바닥과 다리, 가방과 옷에 묻었다. 흰 운동화가 다시 갈색이 됐다. 비는 부슬부슬 내렸다 그치는 걸 반복했다. 힘들게 오른 정상은 안개 때문에 온통 밝은 회색빛이었다. 아무것도 보이는 것 없는 차가운 회색빛.

얼마나 더 가야 정상인지 궁금해 하산하는 아주머니에게 물었더니 ‘왔던 만큼 더 가면 정상’이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주욱- 돌아오면 된다고 했다. 등산 스틱을 한 바퀴 빙 돌리면서 말했다. 왔던 만큼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타인의 입으로 들으니 ‘역시 그렇지, 당연한 걸 물었네’ 싶었다. 오름이, 숲길이, 먼저 가르쳐 준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오늘도 뼈저리게 느꼈다. 왔던 만큼만 돌아가면 떠나온 곳, 출발했던 곳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