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 달 살기 23. 제주와 나의 짧은 이야기들

2018. 9. 11. 21:23여행을 기록하자/제주도 한달살기

[23]
짧은 이야기들

1. 너의 무게

8월의 맑은 여름날이었다. 어김없이 어딘가로 향하는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 그냥 지나쳤으면 밟았을지 모를 작은 새 때문이었다. 참새와 비슷해 보였다. 아니, 좀 더 작은가. 날개를 오므리고 눈을 감고 있던 새는 잠깐 잠이 든 것처럼 보였다. 곧 깨어나서 포르르 날아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대로였다. 길이 좁아 누군가의 발에, 타이어에 밟히지 않을까 고민하던 찰나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찌는 듯한 더위에 물을 적셔 목에 두르려 했던 파란 손수건이었다. 죽은 동물을 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손수건을 넓게 펴 새를 감싸 들어 올렸다. 너무 가벼워 뭔가를 들었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손수건의 무게만 느껴졌다. 생명의 무게가 이렇게 가벼울 수 있나 싶었다. 여전히 자는 듯 가만히 몸을 뉜 새를 낮은 돌담 위에 올려 두었다.
아직도 그 새를 들어 올리던 감촉이 생각난다. 무언가가 내 손에 안에 있다는 ‘느낌’만 있었던 그 순간이. 이렇게 가벼워도 되나 싶을 정도로 믿기지 않던 새의 무게가. 이렇게 가벼울 거면 죽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 하는 이상한 생각을 하던 순간도.


2. 안갯길

9월 1일의 하늘은 오후가 될수록 안개를 만들어냈다. 부슬비가 바람에 휩쓸려 휘잉- 할 때마다 안개와 함께 움직였다. 바람이 밀어내는 쪽으로 안개와 비가 맥을 못추고 떠밀려갔다. 궂은 날씨에도 오름을 찾았다. 조수석에 앉아 사방이 뿌연 그 돌길에 차가 뒤뚱거릴 때마다 나도 같이 흔들렸다. 차가 앞으로 나갈 때마다 양옆으로 어지럽게 핀 풀들이 차를 철썩철썩 때렸다. 당장 1m 앞에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안개였다.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묘한 설렘이 교차했다.
오름 입구에 내려 올려다본 D 오름은 안개에 가려 꼭대기가 보이지 않았다. 바람 소리만 울릴 뿐 주위는 적막했다. B 오름에 가려 했는데 길을 잘못 들어 근처 가까운 D 오름 앞에 차를 댄 것이었다. 관리사무소처럼 보이는 곳을 서성이자 머리가 벗겨진 중년 남성이 먼저 말을 걸었다. 뭐 찾는 거 있어요? 화장실? 임시 화장실 위치는 저쪽이라며 내 뒤로 손을 뻗었다. 나는 B 오름은 어떻게 가야 하는 건지 물었다.
“원래는 저쪽 길로 가면 보여요. 길 따라가면 되는데 오늘은 안개 때문에…”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난 감사하다 말하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더듬더듬 걸어갔다. 양옆으로 풀이 자라고 자잘한 돌이 섞인 흙길이었다. 하늘과 주위는 온통 옅은 회색이었다. 저 멀리 오른쪽 어딘가에 나무 형태가 흐리게 보일 뿐이었다. 안개를 뚫고 가면 왔던 길과 같은 풍경이 계속 이어졌다. 얼마나 왔는지 모르겠는 시간이었다. 한 치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마치 시공간을 초월하는 곳 같았다. 저기 어딘가 문이 있을 것도 같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상한 세계로 들어간다든가 하는 이야기 속 신비의 문 말이다. 그렇게 잡히지도 만질 수도 않는 안개는 오로지 보이기만 했다. 직접 걸어봐야 저 너머엔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길을 잠시 걸었다. 끊임없는 안개, 명도(明度) 차 없이 일정한 색을 띠는 희뿌연 길을 걷다 되돌아왔다. 맑은 날 다시 찾은 B 오름은 환하게 열린 길을 보여줬다. 하지만 난 아직도 그 길이 생각난다. 물 서린 그곳이. 옅은 회색빛 하늘의 고요함과 적막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