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 달 살기 30. 내가 등산을 하는 이유

2018. 9. 18. 23:52여행을 기록하자/제주도 한달살기

[30]
한라산(영실코스)

드디어 한라산을 등반했다. 내가 다녀온 탐방로는 영실 탐방로다. 가장 쉬운 코스에 속하지만, 너무 힘들어서 자주 쉰 탓에 윗세오름까지 가지 못하고 윗세오름 대피소까지만 갔다. 영실 휴게소-병풍바위-노루샘-윗세오름 대피소 이렇게 약 3.7km를 걸었고, 해발 1700m까지 오르고 내려왔다. 병풍바위와 영실기암이 있는 곳은 끊임없이 계단을 올라야 해서 힘들었다. 약 한 시간 동안 계단만 올랐다고 봐도 될 정도다. 등산화나 등산 스틱도 없는 나는 오름에 오르듯이 가벼운 복장과 캐주얼 운동화를 신고 올랐는데, 과연 한라산은 한라산이었다. 경사가 높아 조금만 가도 지쳐서 자주 쉬어야 했다.


11시 반에 오르기 시작해 1시 50분에 윗세오름 대피소에 도착했다. 윗세오름 탐방 제한 시간이 2시인 줄 알았는데 1시 반이어서 제한 문구가 걸린 띠로 막아 놓았다. 아쉬운 대로 사진만 찍었다. 돌에 새겨진 ‘해발 1700m’라는 숫자가 믿기지 않았다. 내가 여기까지 올라왔다는 게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쉬는 시간을 좀 더 아꼈더라면 윗세오름까지 갈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다.

집에 돌아와 피곤한 몸을 이끌고 글을 쓰는 지금에야 산의 여운을 느끼지 사실 몇 시간 전, 끊임없는 나무 계단을 오르면서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은 등산을 할까’, ‘사람은 왜 사서 고생하는 걸까’ 하는 식의 생각을 했다. 우리 집에 밥 먹으러 오는 고양이 순무는 산을 오르지 않는데, 사람인 나는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던 거다. 이유를 찾아보기로 했다.
등산은 머릿속을 아무 생각 없는 상태로 만들기 좋다.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더 나아가 자연 앞에 내가 작디작은 존재임을 느낄 수도 있다. 이게 바로 등산의 이유 일 거다. 음, 하지만 일단 정답 같은 이유들은 다 뒤로하고 다시 생각해본다. 등산로 계단 위에 있는 밧줄을 잡지 않고선 도무지 걸을 수 없을 정도라도, 계속 걷다 보면 힘듦에 조금씩 익숙해진다. 간식을 먹고 휴식도 취하니 다시 걸을 힘이 난다. 그러고 나면 이상한 생각도 어느 순간 멈춘다. 또다시 발바닥은 불이 난 것처럼 욱신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걷다 보면 어느새 출발 지점에 와있다. 내가 걸었던 것에는 딱히 이유랄 게 없었다. 느낌만 있었을 뿐.
오늘 내가 느낀 등산은 이런 거다. 같은 탐방로를 그대로 걷고 내려왔으나 그 풍경이 다르다는 것. 경사가 가파른 곳을 오르고 또 올랐더니 예상외에 평지가 있었다는 것. 이 두 가지다.


그렇다면 순무는 안 하는 행동을 나는 왜 하느냐,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사람이라서 그렇다. 사람이라서 산을 오른다. 사람이어서 안 해본 짓도 해보고, 안 가본 곳도 가보는 거고 더 다양한 경험을 하기 위해 시간과 돈을 사용하는 거다. 당연한 얘기지만 오늘은 꽤 진지하게 생각해봤다. 그렇다고 등산의 이유를 굳이 따지자면 잘 모르겠다, 가 내 대답이라는 거다. 자주 하다 보면 오늘 느낀 것처럼 계속 뭔가가 쌓여 알게 되겠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한라산은 백록담을 보러 몇 번이고 다시 가고 싶은 곳이다. 오늘은 못 봤으니 언젠가는 꼭 내 두 눈으로 담으리라 다짐한다.

추가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삼색 고양이를 만났다. 산에서 보니 삼색 무늬가 마치 호랑이 같았다. 작은 호랑이. 앞서 적었던 고양이는 산을 오르지 않는데 왜 나는 오르냐는 생각이 무안해지는 순간이었다. 온통 까마귀만 있는 곳에서 뜬금없이 고양이를 만나니 무척이나 반가웠지만, 그 순간 순무 생각이 났다. 순무야 미안하다, 내가 고양이를 얕봤구나. 고양이도 등산하더라. 밥을 주면서 말해줬다.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