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 달 살기 32. 우리 모두의 안녕

2018. 9. 20. 23:57여행을 기록하자/제주도 한달살기

[32]
만춘 서점-더 아일랜더-동문시장

1.
오전 8시 반쯤 눈이 떠져 마라도 가는 12시 반 배를 예약했다. 10시 10분에 차를 타고 나가려는 도중 파도가 높아 배가 취소됐다는 전화를 받고 차를 돌렸다. 우리 동네도 빗방울이 점점 굵어져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내일도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어 표를 환불했다. 이번 여행에선 결국 마라도는 못 가게 됐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만춘 서점으로 갔다.


만춘 서점은 깔끔하고 잘 정돈된 책방이었다. 주인장의 취향이 확고한 게 드러났다. 그래서 책방이 아니라 서재 같았다. 작가는 타인에게 자신의 서재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데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그곳에서 거의 한 시간 동안 책을 들춰봤다. 대부분 좋았지만 사고 싶은 책은 없어 돌아왔다. 조금씩 다 읽어보고 싶은 책들이라 딱 하나를 고르기 어려운 점도 있었다. 주인장은 지인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난 책을 읽으며 대화를 엿들었다. 무슨 얘기인지는 모르지만 ‘일해야죠’, ‘돈 벌어야죠’라는 말이 귀에 꽂혔다. 이상하게 나한테 하는 말처럼 들렸다. ‘한 달 놀았으니 일해라, 돈 벌어라’라고 하는 것 같았다. 괜히 찔린 나는 책에서 해답을 찾겠다는 듯이 이 책 저 책을 뒤적거렸다. 그래도 다시 쳇바퀴 도는 삶을 살고 싶진 않다. 취업에 대한 문제는 조금 더 고민할 거다.

2.
어제저녁부터 꼬박 하루 동안 순무에게 밥을 주지 않았다. 내가 가면 누군가가 사료를 꼬박꼬박 챙겨줄 수 없으니 미리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그래도 순무는 막무가내다. 밥 달라고 눈만 마주치면 애옹애옹 운다. 미안하다고, 사료는 다 먹었다고 말해도, 두 손바닥을 펴 아무것도 없음을 보여줘도 이야오옹, 하고 말을 건다. 자꾸만 밥 줬던 자리로 가 아무것도 없는 바닥을 핥는다. 사료를 조금씩 줄였어야 했는데 내 탓이다. 순무의 가족들이 마당으로 오면 한 움큼씩 부어 준 탓에 사료가 금방 동이 났다. 남았으면 사장님에게 가끔 아이들 밥을 줄 수 있냐 부탁할 참이었는데, 사장님도 올해까지만 김녕에 머물 예정이라 그럴 수 없었다. 내가 할 일을 떠미는 것 같아서.
책방에 갔다가 더 아일랜더와 동문시장에서 기념품을 사고 일찍 집에 들어오니 여행의 끝이 실감 났다. 그래서 좀 울었다. 순무는 밖에서 울고 난 집 안에서 울었다. 그러다 잠이 들었고 일어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짐을 싸고 집을 정돈했다. 아직도 마당에 있는 순무를 보니 안쓰럽고 딱했다. 귀여운 발바닥엔 굳은살이 박혔다. 너야말로 하루하루를 고단하게 살겠지. 며칠 전 너는 산을 오르지 않아도 돼서 좋겠다고 생각한 게 미안해졌다. 굶주린 채로 산이 아닌 이 동네를 쏘다닐 텐데. 이곳저곳 만져주고 돌멩이로 놀아줬다. 순무가 날 놀아준 건가. 웃음이 났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사랑스러운 순무. 너는 내일이면 내가 이곳에 없다는 걸 알아챌까, 내 모든 마음을 담아 부디 안녕을 바란다. 너와 나, 우리 모두의 안녕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