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 달 살기 31. 패터슨의 시간을 빌릴 수 있다면

2018. 9. 19. 23:04여행을 기록하자/제주도 한달살기

[31]
구들책방

1. 짜이 티 대신 만난 두 권의 책

오늘은 늦장을 부렸다. 똑같이 9시 반에 일어나 아침으로 과일을 먹고, 버섯을 볶아 점심을 먹었다. 차를 마시며 <비행운>을 읽고 두 시 반쯤 느지막이 외출했다. 구들 책방이라는 헌책방으로. 조천에 위치한 책방인데 노란색 건물이 바라나시 책방과 닮았다. 짜이티를 판매한다는 블로그 후기를 읽고 갔는데 이제는 안 판다고 했다. 책을 읽으며 짜이티를 먹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주인장이 내민 메뉴판에는 커피, 콜라, 컵라면, 쥐포 이렇게 네 가지가 적혀있었다. 이상한 조합이었다. 콜라는 먹기 싫어서 못 먹는 커피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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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이라 음료값을 내고 책을 읽는 공간인 줄 알았는데 책을 살 수도 있었다. 종류도 다양했다. 제주 여행서, 잡지 <iiin>, 일본 문학, 한국 문학, 고서적, 만화책 등이 있었다. 한편에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있어서 바닥에 앉아 책을 읽었다. 김영갑 작가의<그 섬에 내가 있었네>뒷부분을 다 읽었고 <걷기 예찬>,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뒤적거렸다. 끝까지 읽으려고 제목을 적어둔 책이었다. 이 두 권을 만나게 되어 기뻤다. 전체적으로 본 책방은 음악도, 책 분류도, 분위기도 조금 산만했지만 가끔 들러 새로 들어온 헌 책은 뭔지 찾아보고 싶은 곳이었다.

2. 요즘 시간과 패터슨 시계의 상관관계

제주는 느린 생활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근데 이상하게 여기에 있으면 시간이 빠르게 간다. 육지의 거의 두 배 같다. 하루하루가 여행이라 그런 걸까, 아니 그래도 그렇지 말도 안 되게 빨리 간다. 오늘을 예를 들어보자. 아침을 먹고 쉬엄쉬엄 빨래를 널고 돌리고, 밥 달라는 순무를 달래고 하다 보면 어느새 점심시간이다. 점심을 먹고 빨래를 다시 널고 차를 마시고 책을 읽다 보니 두 시가 됐다. 두 시 반에 외출해 여섯 시 반에 돌아왔다. 저녁을 먹으니 또 일곱 시가 넘었다. 순무에게 밥을 주니 주위는 어둑해졌다. 핸드폰으로 제주 구인 정보를 찾다 보니 또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늦기 전에 글을 쓰기 시작한다. 시계를 보니 벌써 열 시가 다 되어간다. 매일 이런 식이다. 외출했다 늦게 들어왔다 싶으면 더하다.
‘시간’하니 ‘손목시계’ 얘기를 해야겠다. 내 손목시계가 고장 났다. 언제인지도 모르게. 난 시계를 안 차면 어색해 왼쪽 손목에 묵직한 무게를 느껴야 안심이 된다. 그런데 햇빛이 강한 이곳에 오니 줄 모양만 빼고 타는 것이 싫어 잠깐 빼둔 것이 다시 차려고 보니 제멋대로 가리키는 시침과 분침이 이상한 거다. 핸드폰 시간과 비교해보니 달랐다. 어쩔 수 없이 서랍장에 넣어두었다. 내 시계는 일명 패터슨 시계인데ㅡ영화 <패터슨>에서 주인공 패터슨이 매일 차고 다니는 손목시계로 인터넷을 뒤져 모델명을 알아낸 후 구매했다ㅡ시간만 알려주는 정직하고 저렴한 카시오 시계다. 난, 그게 너무나 진실해 보였다. 시간을 알려 주는 것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충실함이 패터슨과 닮기도 했고.

사실 그가 사는 삶에 매료됐고 ‘내가 원하는 삶이 바로 저거다!’라고 느껴 구매했다. 이 시계를 차는 한 그를 잊지 말자는 생각이었는데 고장 나버렸다. 그래서 난 몇 시인지 궁금하면 핸드폰을 꺼내 보는 낯선 생활을 하고 있고 점점 시간과 요일에 대한 감각이 사라지고 있다.
어쩌면 시계가 고장 나서 이곳의 시간이 더 빠르게 사라지는 건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만약 약을 갈아 다시 차고 다니면 시간이 좀 더디게 갈까? 슬프지만, 아니다. 시간이 빨리 가는 건 내가 여행하는 순간순간에 집중했고 그만큼 즐거워서 그렇다는 걸 안다. 그래도 시간을 좀 붙잡아두고 싶다. 아, 패터슨 시계가 그걸 도와줬으면 싶다. 하지만 주변에 시계를 고칠 곳이 마땅치 않다. 유난히 느리고 일정하게 가던 그의 시간을 좀 빌리고 싶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러니 이곳을 떠나는 날까지 시간이라도 마음껏 쓰기로 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가득 채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