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석 눈치 보기

2018. 9. 24. 23:58에세이 하루한편

  


  마스터 건반을 꼼꼼히 싸서 상자에 넣어뒀다. 책상에 올려두었던 걸 몇 달째 쓰지 않아 치운 거였다. ‘작업 안 해 비옆에 세워두었다. 88 건반을 검은 천 가방에 넣고 세워 둔 것이 마치 검은 비석 같아 붙인 이름이다. 작업 안 하는 사람에게 세워주는 비석이어서 작업 안 해 비. 올해 겨울, 작업실을 빼고 내 방으로 장비들을 옮겨왔다. 조그만 책상 옆에 88 건반을 뒀지만 불편했다. 방안에 짐이 많아 넉넉한 공간이 안 나왔다. 그래서 검은 천 가방에 넣고 임시방편으로 세워 뒀다. 그리곤 책상 크기에 맞는 61 마스터 건반을 짐 속에서 꺼내와 책상 위에 올려뒀다. 하지만 그 뒤부터 음악 작업을 하지 않았다.

  곡을 쓰려고 해도 집중이 안 됐다. 맨날 같은 코드만 누르는 게 답답했다. 카피를 해보자, 새로운 장르를 써보자 했지만 금세 흥미를 잃고 한숨을 쉬어댔다. 완성하지 못한 프로젝트 파일만 쌓여갔다. 음악으로 하는 일마다 안 풀렸다. 포트폴리오 메일을 보내도 연락 오는 곳이 없어 고민 상담을 하러 교수님을 찾아갔다. 음악을 듣더니 너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너무 많다며 딱히 해줄 말이 없다고 했다. 본인 경험담을 이야기해주고 나를 돌려보냈다. 그때부터 조금씩 자신감을 잃기 시작했다. 작곡가 어시시트를 구한다는 사람도 찾아가 봤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많이 부족하다였다.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엄마와 통화하며 괜찮은 척했지만 사실 그날 밤, 잠이 안 와 수면유도제를 먹고 잤다.

 

  그래서 작업 안 해 비옆에 새로운 상자 하나 더 늘어난 건 단순한 일이 아니다. 작업을 그냥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아주 오랫동안 하지 않겠다는 뜻이며 어쩌면 두 번 다시 음악을 안 할지도 모른다는 암묵적인 표시인 셈이었다.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내 건반들을 팔까 생각하다가 마스터 건반은 B에게 빌려주기로 했다. 음악을 하고 싶어질 때면 다시 돌려받기로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씁쓸한 마음이 가시질 않아서였다. 물건도 누군가에게 쓰이는 게 좋을 테니 잘한 결정이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88 건반을 파는 건 아직 용기가 안 나 보류했다. 저 비석을 치워버리면 진짜로 음악을 안 한다는 게,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포기했다는 게 실감이 날 것 같아서다.

  난 이 시기가 권태기라 생각한다. 음악과 나의 권태기. 그러니 아직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시간이 지나 봐야 알 것 같다. 자연스레 알게 되겠지. 그래도 이젠 음악은 안 쓰지만, 글은 쓴다. 글 쓰는 작업은 하고 있으니 작업 안 해 비가 조금 덜 무섭다. ‘나도 노력은 하고 있다고!’ 하며 말할 거리는 있으니 말이다. 비석은 여전히 오른쪽 스피커 뒤에 검은 눈을 번뜩이며 서 있다. 곡이든 글이든 쓰긴 쓰는 거니까 그게 그거 아니냐며 괜히 찔린 내가 키보드 자판을 두드린다. B에게 건반을 빌려주고 나면 당분간 혼자 남을 비석 눈치를 좀 봐야 할 것 같다. 더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는 수밖엔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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