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하는 척하며 잔소리 하지 말자

2018. 8. 3. 00:00에세이 하루한편




  오랜만에 할머니댁에서 고모를 봤다. 평일 오후 1시가 넘은 시간에 집에 있으니 오늘 휴가냐고 물으셨다. 나는 아, 예로 운을 띄우고 "저 7월부로 퇴사했어요."라고 말했다. 돌아온 대답은 "어머 잘했다, 얘."였다. 엥? 잘했다고? 예상 외의 답변이었다. 잔소리가 후두둑 쏟아질 줄 알았으니. 자신감을 얻은 나는 퇴사의 목적인 여행 계획을 말했다. 딱 여기까지가 고모의 호의적인 반응이었다. 하하. 


  -돈은 많이 모았겠다, 많이 모았지?

  -아뇨, 그냥 조금요..

  -얼마나 모았어?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할게, 말해 봐.

  -(본능적으로 말하면 안되겠다 감지) 아이, 아니에요. 얼마 못 모았어요. (웃으며) 왠지 말 하면 안 될것 같은데요?


  -(얼굴을 슬쩍 보고선) 좀 탔다? 탔지?

  -(갑자기?) 네? 아, 저는 피부가 좀 까만게 좋더라고요. 

  -그래, 하얀 것 보단 까만게 낫지. 우리 ㅇㅇ이는 하얗다 못해 아주 창~~백해서 큰일났어.

  -아, 예. (저 탄게 아니라 원래 까만데요.)


  -(할머니에게 옷을 갖다주다가 불쑥) 실용음악과 나오면 교사 자격증은 안 주나?

  -자격증 받으려면 절차가 필요한 걸로 알고있어요. 

  -너는 그럼 자격증 발급 안됐어?

  -네. 저는 교사 할 생각이 없어서...


  -(엘리베이터 기다리는 도중에) 나중에 피아노 학원 하나 내.

  -(또 갑자기?) 아, 제가 피아노 학원에서도 일 해보고 회사 다니기 전에 강사도 했었거든요. 근데 저한테 잘 안맞는 것 같아요.

  -그럼 뭐가 맞어?

  -(웃으며) 찾아봐야죠.

  -(엘리베이터를 타며) 요즘은 여자도 직장이 꼭 있어야 돼.  



(듣기 싫어)


  이런 대화를 했다. 한 시간 남짓 같이 있었을까,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이 질문들이 과연 애정 어린 질문이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진짜 궁금해서 그런 것 일 수는 있겠지. 하지만 본인이 말하고 싶은 얘기를 꺼내기 위해 유도하는 대화는 지친다. 힘들다. 그냥 수고했다, 한 마디 해주면 좋았을텐데. 무엇보다 같은 질문에 본인이 대답할 수 없다면 물어보지 말자. (반대로 내가 재산을 물어보면 대답해 주셨을까?) 그 누가 되었든 말이다. 난 이게 나이가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진심으로 상대방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묻지도 말자. 서로 피곤해 질 뿐이니까. 우리 모두 걱정을 빙자한 잔소리는 이제 그만하자. 걱정하는 척 하지 말자고.


  (그리고 나 원래 까무잡잡하다. 하얀 편 아니다. 매번 만날 때 마다 탔다고 좀 하지 마시길! 하얀 피부가 무조건적으로 예쁘다는 생각도 강요하지 마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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