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세포분열 중

2018. 10. 5. 21:30에세이 하루한편



  난 우유부단하다. 이름 하나 짓는 것도 오래 걸린다. SNS 계정을 지웠다고 쓴 글에 적었듯이 영화 음악 작곡가로 활동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만든 이름은 유월이었다. 내가 태어난 달이 유월이기도 하고 발음하기도 좋고 내 분위기와도 잘 어울려서 지은 거였다. 무엇보다 무난해서 음악을 하거나 글을 쓸 때 사용하기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포트폴리오를 유월이라는 이름으로 돌렸다. 근데 유월이라는 이름으로 엔딩 크레딧에 올라간 작품은 하나도 없다. 모두 이름을 만들기 전이나 만들 즈음에 만난 작품들이기도 하고, 막상 나를 소개하거나 대화를 나눌 때 어색해서 말을 못 꺼냈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번째 이름을 지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분야의 이름에 어울리는, 재치 있다 느껴지는 단어를 찾아 머나먼 여행을 떠났다는 건 기억한다. 그래서 수없이 단어를 재며 고민했다. 유명인들은 예명을 어떻게 지었는지 일화도 찾아봤다. 의미가 숨겨진 이름도 있었지만 대부분 어쩌다 만들어진 경우가 많았다. 다시 말하면 큰 뜻이 담겨 있진 않다는 말과 같았다. 그래? 그럼 나도 한 번 의미 없이 만들어봐야지. 그래서 블로그를 개설하고, 닉네임을 적는 페이지를 띄워놓은 후에 책을 들췄다. 그때 당시 읽었던 책은 <쓰기의 말들>이라는 은유 작가의 책이었는데, 눈을 감고 책을 펼쳐서 첫 번째로 눈에 들어오는 단어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들기로 했다. 그렇게 두세 번의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게 지금의 이름 담차.

  담차는 생각보다 의미 있는 단어였다. 난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지만. ‘담차이야기하던 김이라는 뜻으로, 주로 담차에로 꼴로 쓰인다고 사전에 나와 있었다. 그럼 이야기하던 김에가 된다. 거기에 쓰자를 붙여 담차에 쓰자로 블로그 제목을 정했다. 그때 부터였다. 의미 없이 지은 말에 의미를 찾기 시작했던 건. ‘을 수도 버릴 수도 있다는 다소 애매한 콘셉트를 생각해 내기도 했다. 블로그는 내 이야기를 담을 수도 있고 너무 많이 담아 차버릴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담차는 그 밖에도 말씀, 이야기 ’() 과 차 ’() , ‘이야기와 차라는 뜻도 가능했다. 둘 다 모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라 이렇게도 갖다 붙일 수 있겠군, 하고 생각했다. 역시 꿈보다 해몽이었다.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의미가 잔뜩 들어간 이름이 부담스러워 의미 없는 두 글자를 갖다 붙였는데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나를 발견하고 있었다. 이름이 아무 의미가 없으면 어떤가 싶으면서도 의미가 있으니 이름이 아닌가, 하는 생각들로 저울질하고 있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질문은 계속 쳇바퀴를 돌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오늘 책방에서 발견한 <박완서의 말>이라는 책에 나온 나목이라는 단어에 꽂혔다. ‘나목은 박완서 선생님의 장편 소설이다. 읽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속으로 이거다!’ 외쳤다. 내 성이 들어간 이름이지만 잘 짓지 않는 거로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는 요즘 그럴 듯해 보이는 단어였다. 어떤 소설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박완서 선생님이 선택한 단어란 이유만으로 그럴 싸 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나목. 소설가다운 이름이었다. 소설을 한번 써보고 싶다는 내 꿈이 반영된 이름처럼 보였다.

  ‘에세이를 쓸 땐 담차를 쓰고 소설을 쓸 땐 이나목이라고 써봐?’ 또 난 내 이름을 가지고 세포분열을 하기 시작했다. 그냥 본명으로 하면 속 편할 텐데, 본명은 너무 나 같아서 싫다. 어느 정도 나라는 기준선을 넘는 이름이었으면 좋겠는데, 그게 또 자연스러웠으면 좋겠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담차는 아무래도 이상해서 이나목이 좋을 것 같은데. 내 맘이 또 언제 변할지 몰라서 쉽게 바꾸지 못하겠다. 꾸준히 이름을 알려야 하는 지금 시기에 블로그를 찾아오는 손님들이 매번 바뀐 이름을 보면 혼란스러울 테니까.

  

  나는 아직도 고민 중이다. 그러다 또 좋은 단어를 만나면 난 흔들릴 것 같다. 존경하는 박완서 선생님의 장편 소설 제목이니 믿고 맡겨 볼까. 뭘 맡긴다는 거지. 소설가의 운명 말인가. 소설을 쓰고 싶다면 필명 고민할 시간에 쓰면 될 텐데. 그래도 오늘 에세이 글감 하난 나왔잖아! 내 속에서 생각들이 서로 싸운다. 이나목은 숲과 나무를 좋아하는, 초록이면 다 좋은 나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 같기도 하고. , 차라리 유월로 다시 돌아갈까? 이유월? 그것도 나쁘지 않은데. 누가 이 세포 분열 좀 멈춰주세요! 나는 참, 너무나도 우유부단하다.


(해바라기처럼 단순히 해만 바라면 이름 짓기 쉬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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