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9. 23:43ㆍ에세이 하루한편
과거의 기억은 반갑지 않을 때가 더 많다. 불쑥불쑥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참 말을 안 듣는다. 잠들려고 누운 머리맡에 나를 기다리는 것 같다. 생각은 눈을 감고 있는 내 얼굴 앞을 휘휘 저어 잠이 들참인지 확인한 뒤, 내 귓속으로 들어가 머릿속을 휘젓는다. 제일 잊고 싶은 기억들을 굳이 꺼내 와 내 눈을 번쩍 뜨게 만든다. 방해꾼을 피하려 난 머리를 좌우로 흔들지만 이미 늦었다. 투명한 물속에 잉크 한 방울 떨어뜨린 것처럼 잡을 수 없이 퍼져버린다.
아직 난 나를 괴롭히는 과거의 생각에서 벗어나는 법을 모르겠다. 다른 장면을 떠올리려고 다른 생각을 불러오는 건 장면 전환이 수동인 극장 안에서 보는 연극 같다. 아주 힘들게 장면을 바꿀 수 있는 낡은 극장 말이다. 옛날 자동차 창문 밑 문을 여는 손잡이 바로 옆에는 길쭉한 네모가 튀어나와 있는데, 그 끝에 동그란 것이 달려있다. 그걸 손으로 잡고 돌리면 창문이 올라가고 내려갔다. 마치 그 장치가 설치 돼 있어 엄청나게 빠르게 돌려야지만 장면 전환을 할 수 있는 무대랄까. 관객들에겐 보이지 않지만, 스텝들이 무대 옆쪽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뭔가를 하는 느낌. 참 애쓴다고 느껴지는 바로 그 느낌이다.
그러니까 단순히 내가 어떤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내 안에는 수많은 생각이 다 같이 손잡이를 잡고 돌려 다른 생각을 끄집어낸다. 바뀐 장면이 편해지면 편해진 대로, 아니면 아닌 대로 생각은 꼬리를 물고 한 편의 영상을 만들어낸다. 연극은 사진으로 이뤄지다 점점 빨라져 영상이 된다. 난 또다시 고개를 젓는다. 거의 매일, 이 상황을 반복한다.
완전히 벗어나긴 힘들어도 잠시 연극을 멈추는 방법은 있다. 다른 이야기를 내 머릿속으로 집어 넣어주면 된다. 바로 책이다. 대부분 생각은 고요한 수면 위, 한 방울 떨어지는 물방울이라 파동이 크지 않다. 나른함과 피곤함이 그 힘보다 커 금세 잠에 빠지지만, 방해꾼들은 다르다. 파동은 파도를 만들고 물을 오염시켜 도저히 피할 곳이 없다. 바로 그럴 때 찾는 것이다. 글을 읽는다. 그러면 내 머릿속에서 춤을 추던 생각들이 하나둘 밀려나기 시작한다. 단어와 문장들을 보면 새로운 연극이 펼쳐진다. 처음 보는 신기한 연극에 빠져들게 된다. 파도가 조금 잔잔해지는 걸 느끼면 책을 덮는다. 그리고 다시 눕는다. 그러면 온몸에 힘이 빠지며 스르르 잠들곤 한다.
나에게 책은 항상 ‘이만하면 됐다’는 느낌을 준다. 특히 파도치는 생각들을 피해 간 책이면 더 그렇다. 조용하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 오직 글자만 수놓아진 섬을 가는 기분이다. 그래서 나는 자주 놀러 간다. 잠이 오지 않을 때면 그 효과가 더욱 두드러지지만, 평소에도 그곳으로 훌쩍 떠나곤 한다. 그럼 나는 잠깐 숨을 고르고 새로운 공기를 들이쉬고 다시 올 수 있다. 그렇게 몇 번, 들숨 날숨을 반복하면 ‘이만하면 됐다’라고 생각하는 거다. 다시 말하면 ‘괜찮다’라는 뜻이다. 책은 나에게 그런 존재다. 자주 쉬러 가는 곳, 그래서 자꾸만 찾아가게 되는 곳이다. 오늘은, 잠들기 전 미리 들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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