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와 할머니를 두고 왔다

2018. 10. 7. 23:33에세이 하루한편



  할머니를 뵈러 갔다. 엄마가 너무 오랫동안 할머니 댁에 있으니 지루할 것 같아서였다. 회사 가기 전 잠시 집에 들른 아빠가 네가 좀 가야 할 것 같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그냥 우리 집에 있었을 거였지만. 나른함을 떨칠 수 없는 오후 두 시 반이 넘은 시간이었다. 할머니 댁은 우리 집과 삼 분 거리여서 금방이지만 어떨 때는 아주 먼 곳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발걸음이 안 떨어질 때가 있었다. 오늘이 그랬다.

  가는 길에 슈퍼에 들러 커피 우유 세 개를 샀다. 세모난 플라스틱 팩에 담긴 거였다. 어릴 때 목욕이 끝나고 빨대를 꽂아 쪽쪽 빨아먹던 거였다. 그때는 하나에 500원이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850원이었다. 가격을 들으니 어린 시절과 지금 사이의 간격이 실감 났다. 우유 세 개가 담긴 비닐봉지를 손에 달랑달랑 들고 갔다. 엄마는 내가 왔다며 이리 좀 나와 보시라고 할머니를 재촉했다. 나도 이어서 할머니, 커피 우유 사 왔어요. 하고 말했다.

  할머니는 침대에서 지팡이를 짚고 한 발짝씩 걸음마를 떼는 아이처럼 걸어 나왔다. 식탁에 둥그렇게 둘러앉아 여자 셋이 세모난 걸 들고 쪽쪽 빨아먹었다. 이런 경우도 처음이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똑같은 걸 똑같이 먹고 있으니 웃겼다. ‘사진으로 남겼으면 좋았을걸하고 생각하며 식곤증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카페인 때문이었다.

  

  내가 할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로션과 스킨을 인터넷 주문해 가져다드리는 거였다. 가끔 할머니가 좋아하는 황도나 후르츠 칵테일 통조림을 사 간다거나 간식거리를 사는 게 다였다. 오늘은 커피 우유였다. 나는 할머니에게 두 손으로 들고 드시라며 손에 쥐여 드렸다. , 끄윽 트림 소리를 냈다. 할머니, 맛있죠? 물으니 빨대를 입에 문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누워 있던 그대로 자국이 나 머리가 산발이었다.

  얘기를 들어주고 맞장구치는 것도 내 역할 중 하나였다. 할머니는 기운이 있을 때면 곧잘 누구네 집 몇 번째 아들이, 딸이로 시작되는 말을 했다. 최근 기억은 흐릿해도 오래된 기억일수록 또렷했다. 커피 우유를 다 먹고 허리가 아프다며 다시 침대로 돌아가 이불을 덮어드렸다. 아이구 허리야, 아이구 어머니, 아이구, 아구아구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먹을 때도, 누울 때도, 소변을 볼 때도 그랬다. 몸 언저리에서 파스 냄새가 풍기는 걸 보니 엄마가 안티프라민을 발라 드린 것 같았다.

  엄마를 먼저 집으로 보냈다. 교대였다. 혼자 놔둘 수 없는 할머니 때문에 누군가가 곁에 붙어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일 년 전부터 부쩍 눈이 더 어두워지고 밝던 귀도 잘 안 들리기 시작했다. 고관절 수술 이후 사 년 만의 일이었다. 걸음을 잘못 걷는 데다 혈관성 치매 판정까지 받으니 할머니도, 우리 가족도 모두 괴로웠다. 병원 가기를 거부하는 할머니 뜻에 따라 집에서 모시는 중이었다. 할아버지, 엄마, 아빠, 시간제 간병인, 내가 돌아가며 시간을 내 할머니 곁을 지켰다. 지방에 있는 오빠도. 할아버지와 엄마의 시간이 가장 많았다.


  거실에서 책을 읽었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부스럭 소리가 나길래 뒤돌아보니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거실로 나와 소파가 목적지였다. 할머니는 또다시 엉금엉금, 사막 거북이 같이 천천히 걸었다. 발에 걸리는 것 하나 없는데도 모래를 헤치고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슬로우 모션으로 보는 화면 같았다. 나는 눈으로 뒷모습을 쫓았다. 소파에 앉은 할머니는 잠시 눈을 감고 왼쪽 오른쪽으로 몸을 천천히 흔들었다. 나름의 운동이리라. 난 다시 등을 돌려 책을 조금 읽다 소파로 가 할머니 옆에 앉았다. 테레비를 틀어보라 해서 뉴스를 틀었다. 앵커가 지뢰밭에 심각성에 관해 설명하고 있었다. 영상엔 지뢰 탐지기를 든 전문가가 지뢰를 발견해 설명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곧장 뭐라고? 하며 나에게 물었다. 그럼 나는 지뢰가 많아서 위험하대요. 하고 말을 전했다. 태풍 콩레이의 피해 지역을 비추는 화면이 나오며 살림살이를 햇볕에 말리고 더러워진 집을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치우는 영상이 나왔다. 할머니는 또다시 뭐라는 거냐 하고 물었고, 나는 태풍 피해 때문에 집 안에 물이 차고 물건이 망가졌대요, 말했다. 그렇겠지, 할머니는 대꾸했다.

  할아버지가 왔다. 이제 나는 집으로 돌아가도 됐다. 또다시 교대다. 집으로 돌아가 내 방에서 읽던 책을 마저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인사를 드리고 네 시 반쯤 집을 나섰다. 닫는 문틈 사이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그 소파에 앉아 같이 뉴스를 보다 저녁을 먹었을 거다. 어쩌면 저녁 시간이 되기 전 휠체어를 밀고 집 근처 산책을 다녀왔을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뉴스를 보며 할아버지가 교회 운동회에서 타온 간식을 먹느라 밥맛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꾸지람을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오후와 할머니를 두고 왔다. 다시 가도 오늘 모습 그대로였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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