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의 속삭임

2018. 10. 14. 23:46에세이 하루한편/다함께 차차차!



약 일주일 전 쿠스미 티(KUSMI TEA) 가게에서 잉글리쉬 블랙퍼스트 티를 샀다. 150년 역사를 자랑하는 차 브랜드인데, 강남에 1호점이 생겼다고 해서 찾아갔다. 나에게 있어 강남은 복잡하고 산만한, 정신없는 곳이다. 웬만해선 가지 않는 곳까지 굳이 들른 건, 그것도 차를 사기 위함이 이유인 건 나에게 있어 대단한 일이었다. 집에서 짜이를 만들어 먹을 요량이었다. 준비물은 홍차와 우유, 향신료다.

 

  “짜이를 만들어 먹으려고 하는데요, 어떤 거로 우리면 좋아요?”

  “? 다시 한번 만직원은 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난 반복해 말했다. 그러자 다른 직원에게 물어보러 가더니 두 가지 종류를 추천해줬다.

  “밀크티 만들어 먹을 땐 이거랑 이게 좋을 거예요.” 직원이 추천한 것 중 하나가 잉글리시 블랙퍼스트였고, 다른 하나는 카슈미르 차이였다. 이름에 차이가 들어간다니 믿음직스러웠다. 내게 만족할 만한 짜이를 만들어 줄 것 같은 든든한 기분이었다. 진열돼있는 견본품 뚜껑을 열어 향을 맡아봤다. 계피와 생강 향이 나는 거로 봐서 우유에 티를 우리고 설탕만 부으면 비슷한 맛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건 쌉쌀한 향이 그윽하게 퍼졌다. 난 굳이 기본, 향이 첨가되지 않은 걸 샀다. 이참에 깔끔한 홍차도 마셔보고 싶었고, 뭐든 기본이 좋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티백으로 사도 되지만 이왕 만드는 거 제대로 해보자 싶어 말린 찻잎으로 된 걸 고집했다. 나에게 더 대접하는 기분을 내고 싶어서.

  가방에 25g짜리 틴케이스 하나 넣었을 뿐인데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제 이태원 포린 마켓에 가 짜이를 끓일 때 넣을 향신료만 사면 된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Mixed spices’라 적혀 있는 봉투에 계피와 잎사귀, 열매 말린 것들을 묶어 판다고 했다. 머릿속엔 이름도 발음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홍차가 가득했다. 빨리 마시고 싶었다. 맛이 어떨까. 사실 홍차를 직접 우려마시는 건 처음이었다. 그동안 라벤더, 페퍼민트, 로즈메리, 캐모마일 이렇게 네 가지 허브차를 그때 그때 기분에 맞춰 마셨다. 몸이 훈훈해지고 차분해졌다. 따뜻한 물을 부었을 때 찻잎이 둥둥 떠 있다 천천히 가라앉는 걸 지켜보는 게 좋았다. 마시면 마실수록 몸뿐만 아니라 주변 공기까지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그 고요한 시간이 감사했다. 그럴수록 더 궁금해졌다. 나에게 더 잘 맞는 차는 무엇인지, 어떤 상황에 어울리는 차는 무엇인지.

 

  나는 카페인에 무지 약하다. 커피를 마시면 몸이 뒤뚱뒤뚱 기우는 것처럼 어지럽고 힘이 없어진다. 심장은 빠르게 뛰고 배가 아파서 화장실을 꼭 가야 한다. 물을 엄청나게 마시고 오줌으로 내보내야 좀 괜찮아질 정도니 웬만해선 잘 안 마신다. 사실, 못 마신다. 그래도 아주 가끔, 카페 라테나 바닐라 카페 라테를 먹는다. 커피는 이상하게 잘 마시고 싶은 척하고 싶다. 뭔가를 즐긴다는 느낌을 주기에 커피가 제격인 것 같았다. 하지만 꽝이다. 나랑은 정말 안 맞는다. 난 카페인에 약하니까. 중요한 건 커피에만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홍차에 든 카페인에도 속수무책 당했다. 그동안 카페에서, 찻집에서 홍차가 들은 음료를 마시면 심장이 두근거리긴 했으니 이미 예견된 일이긴 하지만. 보통 점심을 먹고 난 두시에서 네 시 사이에 텀블러 한 병, 그러니까 500mL 정도를 마셨더니 새벽 서너 시까지 잠이 안 왔다. 그래서 다음 날, 부러 시간을 맞춰 오후 한 시에 먹어봤다. 정확히 개량하는 게 아니라 눈대중이었지만 티스푼으로 하나, 300mL를 넣고 우려 소주잔만 한 컵으로 세 번 홀짝였다. 새벽 세 시까지 못 잤다. 바로 어제 일이다. , 커피는 안 마셔도 상관없는데 홍차는 아니다. 이렇게 좋아하는 내 마음을 몰라주고 몸에서 안 받으니 섭섭하다. 홍차까지 거부할 건 뭐람. 난 그럼 허브차만 마셔야 한다는 건가. 안 된다. 도저히 이건 양보할 수 없다.

  

  차는 내 인생에 낙이다. 기쁨이다. 예전에 없던 따뜻한 시간이 생겼다는 뜻이다. 그 시간을 계속 누리고 싶다. 찻잎 살 돈이 다 떨어지면 티백이라도 우려 마시며 잠깐의 여유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나에게 차란 그런 존재다. ‘계속해서 너 자신을 살피는 시간을 갖길 바라라고 말해주는 존재. 천천히, 충분히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에게만 들리는 작은 속삭임 같은 것. 난 내가 그 이야기를 계속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홍차를 포기할 수 없다. 짜이도 아주 많이 만들어 먹을 거다.

 

  나를 자주, 살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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