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도 초록이

2018. 10. 20. 23:44에세이 하루한편



짜이 향신료(Mixed spices)를 사러 이태원 포린푸드마트에 갔다. 외국인 마트를 간 건 처음이었다. 가게 내부는 생각보다 컸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신기한 게 가득했다. 각종 향신료와 치즈, 병에 담긴 피클, 채소, 음료수 등등 각기 각국의 제품이 정리돼있었다. 한국을 포함해 일본, 인도, 독일, 태국 등, 내가 가보지도 못한 나라의 먹거리들이었다. 얼마나 다양한 제품이 있는지 사고 싶은 물건이 가득한 문구점에 간 기분이었다.

  향신료가 어디 있는지 찾다가 직원에게 물어볼까 했지만, 외국인이라 망설였다. 검은 피부에 빨간 유니폼을 입고 있는 직원. 물건을 정리하는 사람 한 명, 재고를 정리하는 사람 한 명, 그 옆에서 인수인계를 해주는 것 같은 직원 한 명도 있었다결국 혼자 찾았다차 종류가 진열된 곳 근처로 가니 있었다. 인터넷에선 4,000원이라고 봤는데 적혀있는 가격은 4,500원이었다. 그새 500원이 올랐나 보다. 드디어 사다니! 직접 짜이를 만들어 먹을 생각에 신이 났다. 이대로 집에 가기엔 아쉬워서 한 손에 들고 가게를 구석구석 구경했다. 살짝 출출해서 과자를 하나 사 먹을까 하고 과자 판매대에 가 둘러봤다. 각종 쿠키가 가득했다. 고추냉이 맛, 바닐라 맛, 라즈베리 맛, 초콜릿 맛 등등. 모양도 동물, 문어, 고래, 등 다양했다. 네모난 크래커가 제일 많았다. 그중에서 나는 동물 모양 과자를 하나 집었다. 독일 과자였는데 돼지, 고양이, , 말 같이 동물 모양으로 만들어진 과자였다. 가격이 안 적혀있어서 얼만지 가늠이 안 갔다.

  계산대에 줄을 섰다. 계산하는 직원도 외국인이었다. 내 앞에서 먼저 계산하는 사람은 백인이었다. 영어로 손님을 능숙하게 응대하는 모습에 혹시 한국말을 못 하면 어떡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안녕하세요.”란 말을 듣자마자 안심했다. 이게 뭐라고 긴장이 됐는지. 나도 웃으며 안녕하세요, 대답했다. 가격은 9,100원이었다. 과자가 4,600원이라니. 150g이었는데 엄청 비쌌다. 나는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내밀었다. 거스름돈 900원을 받아야 했지만, 은색 카운터 위에는 천 원짜리 지폐가 올려져 있었다. 나는 “900하고 입을 뗐다. 직원은 손을 저으며 괜찮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외국은 팁 문화가 있어서 그런가, 나는 신기했다. 게다가 이것 좀 먹으라며 커피 사탕 봉지를 카운터 옆쪽에 우르르 쏟아 두 개를 건네줬다. 앞에 계산한 손님에게도 주더니 나에게도 줬다. 나는 감사합니다, 하고 받았다.



  

  마트 한 번 들어가 구경한 것뿐인데 외국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었다. 가게 안에는 온통 외국인이었다. 한국인은 나를 포함하면 세 명이 전부였다. 히잡을 두르고 아들을 데리고 온 사람, 이어폰을 꽂고 쇼핑 바구니에 물건을 담는 백인, 물건이 어디 있나 직원에게 물어보는 흑인, 동양인인 나까지. 인종이 다양했다. 가게를 나왔다가방에 물건을 넣고 과자를 도로 꺼내 뜯었다하나씩 집어먹으며 걸었다. 거리에도 외국인이 많았다. 외국 어딘가에 있는 코리아타운에 와있는 기분이었다. 거리 한쪽 좌판에서 코리아라고 적힌 티셔츠를 들고 고민하는 외국인 두 명을 봤다. 저 사람들은 한글의 무늬가 맘에 들어서 사는 거겠지. 나에게 코리아는 그냥 코리아일 뿐인데. 문득 나도 오키나와에 갔을 때 ‘OKINAWA’라고 적힌 섬 모형을 산 게 떠올랐다. 저 사람들에겐 코리아라는 글자가 신기한 모양이자 기억하고 싶은 이름이겠지. 여행자란 뭐든 걸 다 특별하게 느끼는 법이었다.

  나도 잠시 여행의 기분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여행. 미뤄두었던 마음속 단어를 꺼내 보았다. 다시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었다. 제주, 다시 제주를 떠올렸다. 그곳에 다녀온 이후 느꼈던 건 내가 사는 서울에 대해 잘 모른다는 거였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서울을 한 달을 산 제주보다 더 몰랐다. 이곳을 좀 더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서만 할 수 있는 것들을 너무 모른 척하고 산 것 같았으니. 조금 더 애정 어린 눈빛으로 봐줘야 했다. 그래야지 내가 또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땐, 비로소 아주 오래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익숙하지만 낯선 서울. 이곳을.

  집으로 가는 길에 무작정 걸었다. 역 세 개쯤을 걸었다. 녹사평역에서 삼각지까지 이어지는 그 길은 나무가 많아서 기분이 좋았다. 마음이 편해졌다. 이곳에도 초록은 있다. 내가 좋아하는 초록. 이곳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보는 중이다. 다시 떠나더라도무작정 떠나고 싶은 곳에도 초록은 있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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