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쌀벌레 나방처럼

2018. 10. 15. 22:23에세이 하루한편



쌀벌레 나방이 자주 보인다. 몸통보다 날개가 길고 몸짓이 굼뜬 벌레 말이다. 화랑곡나방이라 불리는 이 벌레는 곡물을 먹고 산단다. 집에서 발견 한 지는 한 달이 넘은 것 같다. 처음에는 방 벽지에 가만히 붙어있는 걸 봤고, 천장 벽, 화장실 거울 위에서도 봤다. 모기나 파리처럼 앵앵대거나 정신 사납게 굴지 않으니 한두 번 처리하다 귀찮아서 놔두었다. 흔하디흔한 이 벌레가 나에게 어떤 느낌을 가져다준 건 얼마 전이었다.

  화장실에서 쌀 나방 두 마리가 짝짓기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화장실 변기 뒤 수납 상자를 올려 둔 곳에 옆에, 두 마리가 엉덩이를 맞대고 있었다. 그러니까 날개를 기준으로 뒤쪽이었다. 그 부분을 나란히 포개고 있었다. 데칼코마니처럼. 아니 우리 집에서 번식하다니! 그날도 잠이 안 와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던 나는 이 장면을 보고 모른 척해야 하나 아니면 중요한 순간에 저세상으로 보내야 하나 고민했다.

  눈이 부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보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수납 상자 안에 있는 거품형 클렌징폼을 거사를 치르고 있는 몸통 위에 뿌렸다. 짜면 바로 거품이 나오는 제품이었다. 슈욱 소리를 내며 두 마리 위에 거품이 몽글몽글 쌓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세 번째 거품을 짜고 있었다. 그러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싶어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 중요한 순간을 방해해버렸다. 잠결에 후자를 택한 셈이었다. 다시 잠이 들었다. 그리곤 까맣게 잊고 있었다. 문득 생각이 나 다시 가보니 흔적이 없었다. 아마 엄마가 치운 게 분명했다. 차라리 보지 않은 게 다행이지 싶었다.


  이 벌레는 특이하다. 잘 날지도 않고 조용하다. 벽에서 떨어지라고 손짓해도 흠칫 놀란 체도 않는다. 묵묵부답이다. 붙어있는 벽 바로 옆을 손으로 쾅쾅 치거나 문에서 떨어지라고 아무리 근처를 때려 봐도 요지부동이다. 그럼 나는 , 너는 참 좋겠다. 무서운 것도 없고라고 말하게 된다. 몇 번 시도하다 옷깃을 길게 해 문에서 떨어지게 했다. 바닥으로 떨어진 쌀 나방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또 가만히 있다. , 바닥이구나 좋다, 이렇게 생각할까? 벽이면 벽, 바닥이면 바닥, 천장이면 천장 크게 날아다니지도 않고 곧잘 지내는 것 같다. 날 무시하는 것 같아 입으로 후하고 불었다. 제 딴에는 태풍 같았을 텐데 잘도 버틴다. 마구 휘둘려 저만치 가도 더듬이 몇 번 움직이는 게 다다. 얼씨구? 나는 오기가 나 두세 번 연달아 불었다. 역시나 그대로다. 기가 찬다.

  너처럼 살면 무서울 거 하나 없겠다. 태풍도 안 무섭고 몇만 배 큰 거인도 안 무섭고, 쌀만 있으면 먹고 평생 살만하네. 뭘 하든 그러려니 하고 살고. 아니, 그러고 보니 꽤 괜찮은 태도인데? 나는 생각했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날갯짓 몇 번 하고 붙어있으면서 잠시 쉬다가 슬슬 배고파지면 움직인다. 굼뜬 움직임 때문에 잡히기도 쉬운데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하련다, 하는 식의 몸짓이 어쩐지 좋아 보였다. 게다가 겁도 없다. 용기가 있는 건지 뭔지. 겁 없는 게 부러웠다. 웃기지만 진짜였다. 저게 바로 미니멀 라이프 아닌가. 벌레에게 인생을 배우다니. 이런 일 흔치 않을 거다. 오늘 온종일 집에 있어서 정신이 어떻게 된 건 아니고, 정말로 든 생각이다.

  큰 것을 바라지 않고 소소하게 일상을 꾸려나가는 쌀 나방에게 인생의 낙이란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럼 뭐라 대답할까? ‘벽에 가만히 붙어 있는 거지’, ‘모두 잠든 새벽에 나누는 은밀한 밀회지잘 모르겠다. 아니면 어쩜 인생에 낙은 없는 걸지도 몰라!’하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럼 기립박수를 보낼 거다. 저 친구는 당연히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다. 쌀 나방이 강연을 하는 상상을 했다. 관중들은 끝나자마자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 친다. 박수갈채가 멎어 들 기미가 안 보여 그 소리가 강당에 울려 퍼진다생각할수록 재밌다. 잠시 웃었다. 이젠 포르르 날아가는 모습을 생각만 해도 웃기다.

  

  이상한 결론이지만 자기에게 충실한 것은 뭐든 보기 좋다. 알고 보면 쟤네도 다 먹고살려고 번식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걸 수도 있다. 내가 못 본 걸 수도 있고. 그래도 우리 집 안으로 온통 쌀 나방 쉼터로 만들 순 없으니 잡아야겠다. 미안하지만, 해충이라니까 이제 보이는 것마다 잡아야겠다. 그래도 네가 남겨준 인생 명언을 잘 깨우쳤으니 네 역할을 다 한 거다. 그래, 고맙다. 너처럼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멀리 안 간다. 갓 블레스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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