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 슈슈의 모든 것 (All About Lily Chou Chou, 2001)/ 희망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2018. 8. 9. 00:00글쓰기 우당탕탕/ 나만의 영화잡지



잿빛의 세계 

 

199191. 새 학기. 그 날을 경계로 세계는 잿빛이 되었다.

 

  중학생이 되자 유이치(이치하라 하야토)의 세계는 달라진다. 적당히 친한 사이라고 생각했던 친구 호시노(오시나리 슈고)가 방학을 기점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처음 호시노의 폭력을 목격한 건 같은 반에 머리를 주황색으로 물들인 친구의 머리카락을 자른 일이었다. 본인이 제일 단정치 못한 옷차림이면서 머리가 길다느니, 좀 자르라느니 사사건건 참견하며 빈정거리던 그 애에게 다가가 때리며 커터 칼로 머리를 사각사각 잘랐다. 친구였던 그는 한 순간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폭력의 맛을 알아버린 그는 습관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고 과시한다. 유이치 또한 피해갈 수 없다. 무리지어 놀던 친구들이 갑자기 자신을 때린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채로 맞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자위해야만 했다. 호시노의 명령 때문에. 반 친구들 모두 그의 말을 거절 할 수 없어 숨죽이며 따를 뿐이다. 자신이 어떤 꼴을 당할지 몰라 방어하는 태세를 갖추는 것이다. ‘쟤가 아니면 내가 당해야 할 일임을 알기 때문에.

  그는 주체 할 수 없이 사악해진다. 집단 폭력은 물론이고 츠다(아오이 유우)에게 원조 교제, 성매매를 시켜 받은 돈을 나눠 갖게 하고 그 과정을 감시하는 인물로 유이치를 지목한다. 유이치는 괴롭지만 시키는 대로 가만히,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다. 암흑 같은 나날이 계속 된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 유이치에게 위로가 되어 주는 건, ‘릴리 슈슈의 음악뿐이다. 릴리 슈슈의 인터넷 커뮤니티 공간의 개설자이자 필리아라는 아이디로 활동하며 그 공간에서 만큼은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쏟아낸다. 음악에 대한 생각과 애정을.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주는 공간이 바로 그 곳이다.

  필리아는 아라베스크에 대해 논한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릴리 슈슈의 히트곡이자, ‘에테르가 충만한 곡’이. 그 노래를 듣고 커뮤니티에서 다른 회원들과 이야기 한다. 잠시나마 숨 쉴 수 있는 시간이다. 좋아하는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나누기도 한다. 드뷔시의 아라베스크를 연주하는 여자 아이, 이름은 쿠노(이토 아유미).

  쿠노도 피해갈 수 없다. 희생양이 된다. 감시자는 유이치. 할 말이 있다며 외딴 곳으로 불러 창고로 들어가라 유인한다. 그 곳은 호시노 아버지의 옛 공장이다. 사업이 망하고 가족이 해산된 것에 대한 분노였다고 말하면 폭력의 이유가 될 수 있을까. 그 안에는 쿠노를 시기하는 여자 아이들과 호시노를 따르는 무리들이 있다. 이유 없이 쿠노를 때리고 성폭행을 시도한다. 그 과정을 캠코더로 찍는다. 유이치는 처음으로, 창고 근처 빈 공터에서 소리 내 운다. 드비쉬의 아라베스크가 흐른다.



날고 싶은 아이들


  일본의 이지메(왕따) 문화가 이렇게 심할 줄은 몰랐다. 영화 내내 한숨을 크게 쉬게 하는 장면이 계속됐다. 뿌연 화면과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 흐르지만 집단 폭력, 성매매, 강간 등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일어났다. 10대의 세계에서.

  어른들이 어른의 역할을 하지 못한 책임도 있다. 이들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이야기를 들어주지 못한다. 유이치의 부모님은 유이치가 그저 착한 아들이라고만 생각하고 담임선생님 또한 쿠노의 왕따를 보고도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츠다와 원조교제를 하는 남성 또한 마찬가지고. 이들 모두 알려고 하지 않고 깊숙이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 사이에 상처의 뿌리는 깊어져 주체 할 수 없는 상황까지 가게 된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아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잿빛의 세계를 벗어나려 한다. 츠다는 이 지긋지긋한 일이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을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쿠노는 삭발을 하고 학교에 나온다. 하지만 유이치는 함구하고 방관 할 뿐이다. 릴리 슈슈의 음악으로 도피하는 것이 잿빛 세계를 벗어나는 유일한 길 일 뿐. 그는 릴리 슈슈의 콘서트에 간다. 그리고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만난 릴리 슈슈의 팬 푸른 고양이를 직접 만나기로 한다.

  그는 공연장에서 호시노를 만납니다. 호시노는 유이치의 좌석이 더 좋다는 걸 알고 그의 콘서트 티켓을 뺏고 나머지 한 장을 찢어버린다. 그리곤 콜라를 사오고 이 사과를 들고 있다가 공연이 끝나면 전해 달라고 얘기한다. 그는 푸른 사과에 적힌 아이디를 본다. ‘푸른 고양이.’

  공연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틈을 타 그는 소리를 질러 이목을 끈다. “릴리다! 릴리 슈슈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진짜로 릴리 슈슈가 나온 줄 알고 그가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으로 모여든다. 혼란스러운 틈을 타 그는 호시노 뒤에 자리한다. 그리고 칼로 찌른다.

그는 잿빛의 세계를 벗어났을까? 그가 끔찍한 세계를 벗어나는 방식은 살인이었다. 릴리 슈슈의 음악만으로 현실을 피할 순 없었으니까.

 


희망과 절망 사이





 

  이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불쾌하고 괴로웠다. 나의 잿빛 세계에 대해 떠오르게 해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기력해져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두 번은 못 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을 현실이기 때문에.

  영화는 희망이 존재하는가를 묻는다. 희망과 절망 사이 어디쯤 살았던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희망이 있었다면 아이들은 다른 선택을 했겠지. 이들은 릴리 슈슈와 관련된 모든 것을 종교화하고 숭배하지만 그것이 구원이 되진 못했다. 아이들의 삶은 절망에 더 가깝다

  성장통에 관한 영화라면 그 방식이 가혹하지만 이와이 슌지가 생각하는 성장은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불협화음이 끊임없이 연주되는 삶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니까.